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가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법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조선의 8조의 법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에 열렸다.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부여는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또 이들의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기원전 37).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 가의 국내성(집안)으로 옮겨 5부족 연맹을 토대로 발전하였다. 그 후,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의 군현을 공략하여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부전 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을 받았다.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렸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또,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국동대혈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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