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의 사회 변화, 무신 집권기 하층민의 봉기, 몽골의 침입과 백성의 생활, 원 간섭기의 사회 변화, 고려 사회의 개방성, 고려 시대의 신앙
무신정변으로 고려 전기의 신분 제도가 동요되어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다. 한편, 무신들 간의 대립과 지배 체제의 붕괴로 백성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무신들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수탈이 강화되었다.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은 종래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많은 농민이 가세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에도 농민 항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어 남부 지방에서도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다. 명종 때 공주 명학소에서는 망이⋅망소이가, 운문, 초전에서는 김사미, 효심이 봉기하였다. 봉기를 일으킨 이들은 지방관의 탐학을 국가에 호소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신라 부흥 운동 같이 왕조 질서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회유와 탄압으로 약간 수그러들었다가 만적 등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이 다시 발생하였다.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 차별에 항거하였다.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고자 최씨 무신 정권은 개경에서 강도(강화도)로 서울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꾀하였다. 지방의 주현민에게는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오랜 전쟁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은 산성과 섬에서의 생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되었으므로 백성은 막대한 희생을 당하였고, 식량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여 굶어 죽는 일이 많았다. 일반 백성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원의 간섭과 원을 따르는 정치 세력에 의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전쟁의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동원됨으로써 막대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몽골 침입시 백성의 생활] 고종 42년(1255) 3월, 여러 도의 고을이 난리를 겪어 황폐해지고 지쳐 조세, 공부, 요역 이외의 잡세를 면제하고, 산성과 섬에 들어갔던 자를 모두 나오게 하였다. 그 때 산성에 들어갔던 백성은 굶주려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가에서 죽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잡아매어 놓고 가는 자가 있었다. 4월,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 병란과 흉년이 든 이래로 해골이 들을 덮었고,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백성이 줄을 이었다. 도병마사가 날마다 쌀 한 되씩을 주어 구제하였으나, 죽는 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무신 집권기 이후로는 하층 신분에서 신분 상승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원 간섭기 이후에는 전공을 세우거나 몽골 귀족과의 혼인을 통해서 또는 몽골어에 능숙하여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원 간섭기에는 친원 세력이 권문세족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원과 강화를 맺은 이후 두 나라 사이에는 자연히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많아졌고,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 사회에는 몽골풍이 유행하여 변발, 몽골식 복장, 몽골어가 궁중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이와 반대로 고려 사람이 몽골에 건너간 수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전란 중에 포로 또는 유이민으로 들어갔거나 몽골의 강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사람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고려의 의복, 그릇, 음식 등의 풍습이 몽골에 전해졌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한다. 원의 공녀 요구는 고려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가져왔다. 결혼도감을 통하여 원으로 끌려간 여인 중에는 특별한 지위에 오른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러므로 공녀의 공출은 고려와 원 사이에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고려에서는 끊임없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몽골과 마찬가지로 왜구도 고려 백성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왜구는 이미 13세기부터 우리를 괴롭혀 왔으나, 14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침략해 왔다. 원의 간섭하에서 국방력을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던 고려는 초기에 효과적으로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지 못하였다. 주로 쓰시마 섬 및 규슈 서북부 지역에 근거를 둔 왜구는 부족한 식량을 고려에서 약탈하고자 자주 고려 해안에 침입하였고, 식량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약탈해 갔다.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해안에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점차 전라도 지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고, 심지어 개경 부근에도 나타났다. 많을 때에는 한 해에 수십 번 침략해 왔기 때문에, 해안에서 가까운 수십 리의 땅에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잦은 왜구의 침입에 따른 사회의 불안정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였다. 왜구를 격퇴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였다. 몽골풍 - 공민왕이 원의 제도를 따라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몽골의 옷차림)을 입고 전상(殿上)에 앉아 있었다. 이연종이 간하려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왕이 사람을 시켜 물었다. (이연종이) 말하기를 “임금 앞에 나아가 직접 대면해서 말씀드리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미 들어와서는 좌우(左右:왕의 측근)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니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즉시 변발을 풀어 버리고 그에게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고려사〉 왜구의 피해 - 조령을 넘어 동남쪽으로 바닷가까지 수백 리를 가면 흥해라는 고을이 있다. 땅이 매우 궁벽하고 험하나, 어업, 염업이 발달하고 비옥한 토지가 있었다. 옛날에는 주민이 많았는데, 왜란을 만난 이후 점점 줄다가 경신년(1380) 여름에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고을은 함락되고 불탔으며, 백성이 살해되고 약탈당해 거의 없어졌다. 그 중에서 겨우 벗어난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과 거리는 빈 터가 되고 가시덤불이 길을 덮으니, 수령으로 온 사람들이 먼 고을에 가서 움츠리고 있고 감히 들어오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양촌집〉 고려 사회의 개방성 - ① 삼국 이전에는 과거의 법이 없었다.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으나, 과거로 인재를 뽑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광종이 쌍기의 의견을 채택하여 과거로 인재를 뽑게 하였으니, 이 때부터 문풍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법은 대체로 당의 제도를 많이 채용한 것이다. ② 고려의 신분 제도는 조상의 신분이 그대로 자손에게 세습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향리가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으며, 고려 후기에는 향, 부곡, 소가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며, 외거 노비 중에는 재산을 모아 양인의 신분을 얻는 자도 있었다. 고려 시대의 신앙 - ① 내 소원은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五岳), 명산, 대천, 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사한 신하가 신위(神位)와 의식 절차를 늘리거나 줄이자고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 속에 행여 행사일이 황실의 제일(祭日)과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고려사〉 ② 나주 사람이 일컫기를 “금성산의 산신이 무당에게 내려서 ‘진도, 탐라(제주)를 정벌할 때에는 실로 내가 힘을 썼는데, 장수와 군사에게는 상을 주고 나에게 녹을 주지 않는 것은 어째서이냐? 반드시 나를 정녕공으로 봉하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정)가신이 그 말에 미혹(迷惑)되어 (충렬)왕에게 넌지시 아뢰어 정녕공으로 봉하게 하고, 또 (나주)읍의 녹미(祿米) 5석을 거두어 해마다 그 사당에 보내 주게 하였다. 〈고려사〉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성의 생활 모습, 농민의 공동 조직, 사회 시책과 제도, 법률과 풍속, 혼인과 여성의 지위 (0) | 2017.04.24 |
---|---|
중세의 사회, 고려의 신분 제도,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 (0) | 2017.04.24 |
남북국 시대의 사회, 통일 후 신라 사회의 변화, 발해의 사회 구조, 통일 신라 말의 사회 모순, 고대 사회 귀족들의 합의 제도, 골품제의 성립 배경 (0) | 2017.04.24 |
백제의 사회 모습, 신라의 골품 제도와 화랑도 (0) | 2017.04.24 |
고대의 사회, 신분제 사회의 성립, 사회 계층과 신분 제도, 귀족, 평민, 천민, 삼국 사회의 모습, 고구려의 사회 모습 (0) | 2017.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