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회는 안에서 성장하고 있던 근대적인 요소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채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후 정부와 각계각층에서는 근대화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제는 강압적인 식민 통치를 통하여 우리 민족을 지배하였다. 이에 맞서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무장 독립 투쟁,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독립 외교 활동 등을 벌여 일제에 줄기차게 저항하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투쟁과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8월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정책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남북 사이의 상호 불신이 깊어 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으로 민주주의가 점차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민족 통일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 간에 식민지 확보 경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뒤늦게 쟁탈전에 뛰어든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영국, 프랑스 등을 상대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1914). 제1차 세계 대전은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연합국측에 가담하고, 독일의 대공세가 실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또,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전제 정치에 항거한 노동자와 농민이 제정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191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에서 경제 공황이 일어났는데(1929), 이는 유럽과 아시아 등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로 사회 불안이 심화되자, 독일에서는 나치즘,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와 같은 전체주의가 대두하였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군비 확장과 대외 침략 정책을 통해 경제 공황을 극복하려 하였고,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체제가 시작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독립한 많은 나라들은 제3세계를 형성하여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채택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였고, 체제나 이념보다는 자국의 국익을 위주로 한 세계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세도 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이 침략해 오고 있었다.

고종의 즉위(1863)로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즉,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는 동시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확고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척화비(斥和碑)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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