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상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송, 요 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졌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고려의 대외 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송과의 무역이었다. 고려는 서해안의 해로를 통하여 송에서 왕실과 귀족의 수요품을 수입하는 대신에 종이, 인삼 등 수공업품과 토산물을 수출하였다.

거란과 여진은 은을 가지고 와서 농기구, 식량 등과 바꾸어 갔다. 일본은 11세기 후반부터 내왕하면서 수은, 황 등을 가지고 와 식량, 인삼, 서적 등과 바꾸어 갔다.

한편, 서역과의 교류도 활발하여 대식국인이라 불리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고려에 들어와서 수은, 향료, 산호 등을 팔았다. 이들을 통하여 고려의 이름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수리 시설과 벼농사의 발달


① 무릇 토지의 등급은 묵히지 않는 토지를 상으로 하고, 한 해 묵히는 토지를 중으로 하며, 두해 묵히는 토지를 하로 한다. 〈고려사〉

② 수리 시설이 이어져 있는 토지는 밭 또는 논으로 서로 경작하며, 토지의 등급을 헤아려 비옥한 토지는 해마다 돌려 가며 벼를 경작하되, 3월 안에 심을 수 없으면 4월 중순은 넘기지 말아야 한다. 〈농서집요〉

③ (공민왕) 11년(1362) …… 논을 다루는 우리 나라 사람은 반드시 크고 작은 도랑에서 물을 끌어들일 뿐이요, 수차(水車)로 하면 물을 쉽게 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논 아래에 웅덩이가 있고 깊이가 한 길이 채 못 되어도 그 물을 내려다만 보지 감히 퍼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땅은 물이 항상 괴어 있고, 높은 땅은 항상 풀이 무성해 있는 것이 십중팔구나 됩니다. 그러니 계수관(界首官:지방 관리)에게 명령하여 수차를 만들게 하고 그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한다면, 민간에 전해 내려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뭄해에 대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 있어서 제일의 계책입니다. 〈고려사〉

1. 고려 시대 농업 기술의 발달 내용을 정리해 보자.

2.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나타난 농업 경영상 변화를 추론해 보자.

승려의 상공업 활동

① 고려는 도선비기에 의거하여 국가의 비보 사찰을 정하여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도록 하고, 그 절에는 사원전과 노비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귀족도 자기 가문의 절을 짓고 토지와 노비를 기증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국가적으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개최하고, 국립 여관의 구실을 하던 원을 절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② 승려들이 심부름꾼을 시켜 절의 돈과 곡식을 각 주군에 장리를 놓아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 〈고려사절요〉

③ 지금 부역을 피하려는 무리들이 부처의 이름을 걸고 돈놀이를 하거나 농사, 축산을 업으로 삼고 장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 되었다. …… 어깨를 걸치는 가사는 술 항아리 덮개가 되고, 범패를 부르는 장소는 파, 마늘의 밭이 되었다. 장사꾼과 통하여 팔고 사기도 하며, 손님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를 불러 절간이 떠들썩하다. 〈고려사〉

조선은 조세, 공납, 역의 수취 제도를 다시 정립하여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충하고, 양반 지배층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였다.

농업에서는 유교적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농서의 편찬과 보급, 수리 시설의 확충 등 안정된 농업 조건을 만들기 위한 권농 정책이 추진되었다. 상공업에서는 시전의 설치, 관영 수공업의 정비 등을 통하여 안정적으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토대 위에 점차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지방에서 장시가 출현하였다. 민간 상공업이 성장하면서 점차 관영 상공업 체제가 쇠퇴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지주 전호제가 발달하여 양반 지주들이 토지 소유를 확대하고 수취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들로 사회적 동요가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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