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난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5군영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하면서 장정 한 명에게 이중 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도 소속에 따라 2필 또는 3필 등으로 달랐다.

임진왜란 이후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역의 재원은 점차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국의 장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자 군포의 부과량을 점차 늘릴 수밖에 없었다.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이로부터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고, 군적 문란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납속(納粟)


부족한 재정 보충 및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돈이나 곡물을 납부한 사람에게 특혜를 준 정책. 면천, 면역은 물론 관직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공명첩(空名帖)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

양반은 양 난 이후 토지 개간에 주력하는 한편, 농민의 토지를 사들여 농토를 늘렸다. 그리고 토지를 소작 농민에게 빌려 주고 소작료를 받는 지주 전호제로 경영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말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지주 전호제도 변화해 갔다. 양반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이며 경제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소작료와 그 밖의 부담을 마음대로 강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소작인의 저항이 심해지자, 소작인의 소작권을 인정하고 소작료도 낮추거나 일정액으로 정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지주 전호제가 지주와 전호 사이의 신분적 관계보다 경제적 관계로 바뀌어 갔다.

대체로, 양반은 소작료를 거두어 생활하거나 이 소작료로 받은 미곡을 시장에 팔아 이득을 남겼다. 또, 토지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토지 매입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리하여 천석꾼, 만석꾼이라고 불리는 지주도 나타났다.

양반 중에는 물주로서 상인에게 자금을 대거나 고리대를 하여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변동 과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여 몰락하는 양반도 나타났다.

농민은 황폐한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복구하였으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고, 새로운 영농 방법을 시도하였다.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이모작이 널리 행해지면서 보리 재배가 확대되었고, 논에서의 보리 농사는 대체로 소작료의 수취 대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작농들은 보리 농사를 선호하였다.

농민은 농업을 경영하는 방식도 변화시켰다. 모내기법으로 잡초를 제거하는 일손을 덜 수 있게 되자, 농민은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지주들도 직접 경작하는 토지를 넓혔지만, 자작농은 물론 일부 소작농도 더 많은 농토를 경작하여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이전보다 넓은 농토를 경작할 수 있게 된 광작 농업으로 농가의 소득이 늘어나 부농이 될 수 있었다.

또,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특히,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쌀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나 장시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었다. 쌀의 수요가 늘면서 밭을 논으로 바꾸는 현상이 활발하였다.

소작 농민은 좀더 유리한 경작 조건을 얻어 내기 위하여 지주에게 대항하여 소작 쟁의를 벌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작권을 인정받아 지주가 함부로 소작지를 빼앗지 못하고, 수확량의 반을 내던 소작료도 일정 액수를 곡물이나 화폐로 내도록 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소작농이라도 상품 작물을 재배하거나 소작권을 인정받고 소작료도 일정 액수만 내게 되면서, 근면하고 시장 경제를 잘 이용하는 농민은 점차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농민은 토지를 개간하거나 매입하여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 농민이 소득을 증대시켜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다. 부세의 부담, 고리채의 이용, 관혼상제의 비용 부담 등으로 견딜 수 없게 된 가난한 농민은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았다. 양반 관료, 토호, 상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토지를 매입하였다.

광작이 가능해지면서 대부분의 농토를 소작시키고 일부 농토만 직접 경영하던 지주도 소작지를 회수하여 노비를 늘리거나 머슴을 고용하여 직접 경영하였다. 이 때문에 소작 농민은 소작지를 잃기는 쉬워지고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농촌을 떠난 농민은 도시로 옮겨 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으며, 광산이나 포구를 찾아 임노동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광산, 포구 등에는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황해도의 수안, 충청도의 강경, 함경도의 원산 등이 그러한 곳이었다.


상품 작물의 재배

농민이 밭에 심는 것은 곡물만이 아니다. 모시, 오이, 배추, 도라지 등의 농사도 잘 지으면 그 이익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도회지 주변에는 파밭, 마늘밭, 배추밭, 오이밭 등이 많다. 특히, 서도 지방의 담배밭, 북도 지방의 삼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 황주의 지황밭에서의 수확은 모두 상상등전(上上等田)의 논에서 나는 수확보다 그 이익이 10배에 이른다. 〈경세유표〉


소작료(지대)의 형태

- 타조법:일정 비율로 소작료를 내는 방식이다.

- 도조법:일정 액수를 소작료로 내는 방식으로, 점차 화폐로 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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