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전쟁 중에 일제는 일본인을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도록 강요하였다. 이후 일제는 국가의 모든 수입과 지출 과정을 장악하였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세를 늘려 나갔다. 나아가, 황실의 수입을 국유화함으로써 황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또, 일본의 제일은행이 중앙 은행 기능을 맡도록 하여 대한제국의 금융 정책을 지배하였으며, 1905년에는 그 동안 사용하던 화폐를 새 화폐로 교환하게 하였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국내의 상공업자나 금융 기관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구실로 국유지나 황실 소유의 토지를 빼앗았다. 이후 여러 가지 구실로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내세워 일본인이 토지를 늘릴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에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은 좌절되었다. 반면에, 일제는 식민지화를 위한 경제적 토대를 갖추어 갔다. 화폐 교환과 한국인의 피해 - 일제의 화폐 정리 사업에 의해 화폐 교환이 이뤄지던 1905년 당시, 한국인은 상평통보(엽전)와 백동화를 사용하였다. 백동화는 갑오개혁 이후에 사용되던 화폐였다. 그런데 일제는 백동화의 화폐 가치가 일정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교환에 불이익을 크게 주었다. 즉, 백동화를 질에 따라 갑, 을, 병으로 나눈 다음, 병종은 교환에서 제외하였다. 한국 상인이 소유한 백동화의 상당수가 을종이나 병종으로 판정받았다. 게다가 소액을 가진 농민은 교환하기도 어려웠다. 한국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막대한 화폐 자산을 상실당하였으나, 이러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던 일본 상인들은 병종 백동화를 이용하여 물건을 구입함으로써 부당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던 많은 회사가 이 때 일본인에게 넘어가기도 하였다. 일제의 경제 침략이 본격화되자, 이에 반대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자는 경제적 구국 운동이 활발해졌다. 러⋅일 전쟁 때 일제가 황무지 개간을 구실로 막대한 국유지를 빼앗으려 하자, 보안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대 투쟁이 일어나 이 요구를 좌절시켰다. 1905년 이후에 일제 침략이 강화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국권 회복의 일환으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회사 설립과 인재 육성에 나선 이들이 많았다.

1907년에는 국민 모금으로 정부가 진 빚을 갚아서 경제 자립과 국권 수호를 이룩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상공인과 지식인들로부터 시작되어 전 국민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이 담배를 끊어 절약한 돈이나, 비녀와 가락지 등과 같은 패물을 팔아 마련한 돈을 성금으로 내어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 취지서

무릇 신민 된 자가 충성과 의리를 가지면 그 나라가 흥하고 백성이 평안하며, 충성과 의리가 없으면 그 나라가 망하고 백성도 절멸하는 것은 비단 고금의 역사상 증거가 뚜렷할 뿐 아니라, 현재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 부강한 나라와 멸망한 나라가 충성과 의리의 여하에 말미암지 않은 나라가 없는 것이다. 국채 1300만 원은 우리 대한의 존망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 갚아 버리면 나라가 존재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대세가 반드시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 현재 국고에서는 이 국채를 갚아 버리기 어려운즉, 장차 삼천리 강토는 우리 나라와 백성의 것이 아닌 것으로 될 위험이 있다. 토지를 한 번 잃어 버리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월남 등의 나라와 같은 처지를 면할 수 있을까? 2천만 인이 3개월을 한정하여 담배의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1인마다 20전씩 징수하면 1300만 원이 될 수 있다. 우리 2천만 동포 중에 애국 사상을 가진 이는 기어이 이를 실시해서 삼천리 강토를 유지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대한매일신보, 1907.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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