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고려보다 관영 수공업 체제를 잘 정비하였다. 전문적인 기술자를 공장안에 등록시켜 서울과 지방의 각급 관청에 속하게 하고, 이들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 공급하게 하였다. 관청에 등록된 장인(관장)들은 의류, 활자, 화약, 무기, 문방구, 그릇 등을 제조하여 납품하였다. 이들은 근무하는 동안에 식비 정도만 지급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량을 초과한 생산품에 대해서는 세금을 내고 판매하여 가계를 꾸렸다. 이 기술자들은 부역으로 동원되는 기간 이외에는 사적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관영 수공업은 16세기에 들어와 부역제가 해이해지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관영 수공업자 이외에 민영 수공업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농민을 상대로 농기구 등의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였고, 양반의 사치품도 생산하였다. 이 밖에, 농가에서 자급자족의 형태로 생활 필수품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이 있었다. 의류로서 무명, 명주, 모시, 삼베 등이 생산되었는데, 특히 목화 재배가 확대 보급되면서 무명 생산이 점차 증가하였다.

조선 초 공장(수공업자)의 수

- 경공장:2800여 명

- 외공장:3500여 명


조선은 고려보다도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다. 여기에 개경에 있던 시전 상인을 한양으로 이주시켜 장사하게 하는 대신에 점포세와 상세를 거두었다.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이들 시전 중에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다. 또,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다.

1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힘입어 증가하였다. 농민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릴 것을 염려한 정부에서는 장시의 발전을 억제하였으나, 일부 장시는 정기 시장으로 정착해 갔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장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보부상은 장시에서 농산물, 수공업 제품, 수산물, 약재 등을 판매하여 유통시켰다.

한편, 정부는 조선 초기에 저화, 조선통보 등을 만들어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부진하였다. 농민은 화폐로 쌀과 무명을 사용하였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주변 국가와의 무역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명과는 사신이 왕래할 때에 하는 공무역과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여진과는 국경 지역에 설치한 무역소를 통하여 교역하였고, 일본과는 동래에 설치한 왜관을 중심으로 무역하였다. 그러나 국경 부근에서 이루어지는 사무역은 엄격하게 감시를 받았는데, 이 때 주로 거래된 물화는 무명과 식량이었다.


조선 전기의 상업

○ 장사꾼이 의복 등속을 판매하며, 심지어는 신, 갓끈, 빗, 바늘, 분(粉) 같은 물품을 가지고 무지한 백성에게 교묘하게 말하여 미리 그 값을 정하고 주었다가 가을이 되면 그 값을 독촉해서 받는다. 〈세종실록〉

○ 경인년(1470) 흉년 때 전라도 백성이 서로 모여들어 점포를 열어 장문(場門:시장)이라 칭하고,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목숨을 유지하였다. 〈성종실록〉

○ 임진왜란 이후 백성은 정해진 곳 없이 교역으로 생활하는 것이 마침내 풍속이 되었다. ……각 읍에서 장시가 서는 것이 적어도 3, 4곳이 되어 …… 한 달 30일 이내에 시장이 열리지 않는 날이 없다. 〈선조실록〉

양반의 경제 기반은 과전, 녹봉, 그리고 자신 소유의 토지와 노비 등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주였으며, 주수입원은 토지와 노비였다. 특히, 양반 소유의 토지는 비옥한 토지가 많았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규모가 커서 농장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양반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노비에게 직접 경작시켰다. 그러나 토지의 규모가 커서 노비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할 수 없으면 그 주변 농민에게 생산량을 절반씩 나누어 가지는 병작반수의 형태로 소작을 시켰다. 양반은 자기 토지가 있는 지역에 집과 창고를 지어 놓고 직접 노비를 감독하고 농장을 살피기도 하였지만, 대개 친족을 그 곳에 거주시키면서 대신 관리하게 하였다. 때로는 노비만 파견하여 농장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농장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욱 증가하였다. 농장주들은 유망민을 모아 자신 소유의 노비처럼 만들어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다.

조선 전기에 양반은 10여 명에서 많게는 300여 명이 넘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비를 사기도 하였지만, 주로 자신이 소유한 노비가 출산한 자녀는 노비가 되는 법에 따라 노비 수를 늘리기도 하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양인 남녀와 혼인을 시켜 늘리기도 하였다.

양반은 노비에게 가사를 돌보게 하거나 농경에 종사시키고, 옷감을 짜게 하였다. 다수의 노비는 주인과 따로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거나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양반은 이들 외거 노비에게 매년 신공으로 포와 돈을 거두었다. 이런 경제 기반을 바탕으로 양반은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녹봉 지급량은 대략 정 1품은 곡식 97석, 삼베 21필, 저화 10장을, 종 9품은 곡식 12석, 삼베 2필, 저화 1장을 받았다.

조선 전기 양반의 토지 소유 규모는 대략 200~300마지기 정도이나 2000마지기 이상의 소유자도 있었다. 대체로 논 한마지기의 넓이는 200평이다.

노비 신공은 노(남자)는 면포 1필, 저화 20장, 비(여자)는 면포 1필, 저화 10장이다.


정부는 세력가들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고 농업을 권장하였다. 농민도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한 결과, 농민 생활은 이전보다 나아졌다.

정부는 개간을 장려하고, 각종 수리 시설을 보수, 확충하는 등 안정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사직설, 금양잡록 등 농서를 간행, 보급하였다. 특히, 농사직설은 우리 나라 풍토에 맞는 씨앗의 저장법, 토질의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민의 실제 경험을 종합하여 편찬하였다. 양반도 간이 수리 시설을 만들고, 중국의 농업 기술을 도입하는 등 농업에 관심이 높았다.

밭농사는 조, 보리, 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으며, 논농사도 남부 지방에서 모내기가 보급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모내기는 봄가뭄에 따른 수리 문제 때문에 남부 일부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시비법도 발달하여 밑거름과 덧거름을 주게 되면서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해서 농사지을 수 있었다. 쟁기, 낫, 호미 등 농기구도 개량되었다. 목화 재배도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었으며, 약초와 과수 재배 등이 확대되었다.

이런 농업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농민 생활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주제가 점차 확대되면서 농민이 자연 재해, 고리대, 세금 부담 등으로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고 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이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로 수확의 반 이상을 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토지를 상실한 농민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게 되자, 정부에서도 대책을 마련하였다. 정부는 잡곡, 도토리, 나무 껍질 등을 가공하여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동시에, 호패법, 오가작통법 등을 강화하여 농민의 유망을 막고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지주인 지방 양반도 향약을 시행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수취 체제의 확립

조선의 수취 제도에는 토지에 부과하는 조세, 집집마다 부과하는 공납, 호적에 등재된 정남에게 부과하는 군역과 요역 등이 있었으며, 이것이 국가 재정의 토대를 이루었다.

조선 시대의 토지 소유자는 원칙적으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토지 소유자인 지주는 소작 농민에게 그 세금을 대신 내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세는 과전법의 경우에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는데,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그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하였다. 세종 때에 조세 제도를 좀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였다.

조세는 쌀, 콩 등으로 냈다. 군현에서 거둔 조세는 강가나 바닷가의 조창으로 운반하였다가 전라도⋅충청도⋅황해도는 바닷길로, 강원도는 한강, 경상도는 낙동강과 남한강을 통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공납은 고려처럼 각 지역의 토산물을 조사하여 중앙 관청에서 군현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각 군현은 각 가호에 다시 할당하여 거두었다. 공물에는 각종의 수공업 제품과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재 등이 있었다. 그런데 공물의 생산량이 점차 감소하거나 생산지의 변화로 인하여 납부 기준에 맞는 품질과 수량을 맞추기 어려우면, 그 물품을 다른 곳에서 구입해다가 납부하였다. 이 때문에 공물은 전세보다 납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부담도 훨씬 컸다.

한편, 16세 이상의 정남에게는 군역과 요역의 의무가 있었다. 군역에는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교대로 근무하는 정군과, 정군이 복무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보조하는 보인이 있었다. 양반, 서리, 향리 등은 관청에서 일하기 때문에 군역에 복무하지 않았다.

요역은 가호를 기준으로 정남의 수를 고려하여 뽑아서 성, 왕릉, 저수지 등의 공사에 동원하였다. 성종 때에는 경작하는 토지 8결을 기준으로 한 사람씩 동원하고, 1년 중에 동원할 수 있는 날도 6일 이내로 제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으나, 임의로 징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국가 재정은 조세, 공물, 역 이외에 염전, 광산, 산림, 어장, 상인, 수공업자 등이 내는 세금으로 마련하였다. 국가는 재정을 군량미나 구휼미로 비축하고, 나머지는 왕실 경비, 공공 행사비, 관리의 녹봉, 군량미, 빈민 구제비, 의료비 등으로 지출하였다.

읽기자료

조선의 수취 제도

각 도의 수전(水田), 한전(旱田)의 소출 다소를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공법(貢法)에서의 수세액을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부터는 전척(田尺)으로 측량한 매 1결에 대하여, 상상(上上)의 수전에는 몇 석을 파종하고 한전에서는 무슨 곡종 몇 두를 파종하여, 상상년에는 수전은 몇 석, 한전은 몇 두를 수확하며, 하하년에는 수전은 몇 석, 한전은 몇 석을 수확하는지, 하하(下下)의 수전에서는 역시 몇 두를 파종하고 한전에서는 무슨 곡종을 몇 두를 파종하여, 상상년에는 수⋅한전 각기의 수확이 얼마며, 하하년에는 수⋅한전 각기의 수확이 얼마인지를, …… 각 관의 관둔전에 대해서도 과거 5년간의 파종 및 수확의 다소를 위와 같이 조사하여 보고토록 합니다. 〈세종실록〉

당시 1두(말)의 용량은 대략 현재 1말(18 리터)의 3 분의 1 정도이다.

정포 1필의 크기는 폭 32.8cm, 길이 16m 38cm, 저화 10장 = 포 1필이다.


조선은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건국 초부터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에 50여만 결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다. 또,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보급하였다.

반면에, 상공업자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업하는 것을 규제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대부들이, 물화의 수량과 종류를 국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활동에 맡겨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며, 농업이 피폐하여 빈부의 격차가 커지게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당시 사회에서는 사⋅농⋅공⋅상 간의 직업적인 차별이 있어 상공업자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경제관으로 소비는 억제되었고, 도로와 교통 수단도 미비하였다. 자급자족적인 농업 중심의 경제로 인하여 화폐 유통, 상공업 활동, 무역 등이 부진하였다. 정부는 화폐를 만들어 보급,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약간의 저화와 동전만 삼베, 무명, 미곡과 함께 사용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국가의 농민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고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상공업에 대한 통제 정책은 해이해졌다. 이후, 상공업에 대한 통제 체제가 무너져 가면서 국내 상공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의 농업 장려 정책

성세창이 아뢰기를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살게 한 뒤에 교화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세종 임금이 농상(農桑)에 적극 힘쓴 까닭에 수령들이 사방을 돌면서 살피고 농상을 권하였으므로 들에 경작하지 않은 땅이 없었습니다. 요즘에는 백성 중에 힘써 농사짓는 사람이 없고, 수령도 들에 나가 농상을 권하지 않습니다. 감사 또한 권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지방에 타일러 농상에 힘쓰도록 함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8도 관찰사에게 농상을 권하는 글을 내렸다. 〈중종실록〉

저화(楮貨)는 고려 말, 조선 초에 발행된 지폐이다.

조선은 관리의 경제 기반을 보장하고 국가의 재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토지 제도를 운영하였다.

과전은 경기 지방의 토지로 지급하였는데,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죽은 관료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받았던 토지 중 일부를 수신전, 휼양전 등으로 다시 지급하여 세습이 가능하였고, 공신전도 세습할 수 있었다. 이렇게 토지가 세습되자, 새로 관직에 나간 관리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15세기 후반에는 직전법으로 바꾸어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다가 16세기 중엽에는 이마저도 폐지하였다.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과전법의 경우에는 10분의 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수조권을 가진 양반 관료가 이를 남용하여 과다하게 수취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성종 때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거두고,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에 양반 관료들이 수조권을 빌미로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방식은 사라지고, 국가의 토지 지배권이 강화되었다.

과전(科田)은 관리에게 준 토지로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국내 상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송, 요 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졌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고려의 대외 무역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송과의 무역이었다. 고려는 서해안의 해로를 통하여 송에서 왕실과 귀족의 수요품을 수입하는 대신에 종이, 인삼 등 수공업품과 토산물을 수출하였다.

거란과 여진은 은을 가지고 와서 농기구, 식량 등과 바꾸어 갔다. 일본은 11세기 후반부터 내왕하면서 수은, 황 등을 가지고 와 식량, 인삼, 서적 등과 바꾸어 갔다.

한편, 서역과의 교류도 활발하여 대식국인이라 불리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고려에 들어와서 수은, 향료, 산호 등을 팔았다. 이들을 통하여 고려의 이름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수리 시설과 벼농사의 발달


① 무릇 토지의 등급은 묵히지 않는 토지를 상으로 하고, 한 해 묵히는 토지를 중으로 하며, 두해 묵히는 토지를 하로 한다. 〈고려사〉

② 수리 시설이 이어져 있는 토지는 밭 또는 논으로 서로 경작하며, 토지의 등급을 헤아려 비옥한 토지는 해마다 돌려 가며 벼를 경작하되, 3월 안에 심을 수 없으면 4월 중순은 넘기지 말아야 한다. 〈농서집요〉

③ (공민왕) 11년(1362) …… 논을 다루는 우리 나라 사람은 반드시 크고 작은 도랑에서 물을 끌어들일 뿐이요, 수차(水車)로 하면 물을 쉽게 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논 아래에 웅덩이가 있고 깊이가 한 길이 채 못 되어도 그 물을 내려다만 보지 감히 퍼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땅은 물이 항상 괴어 있고, 높은 땅은 항상 풀이 무성해 있는 것이 십중팔구나 됩니다. 그러니 계수관(界首官:지방 관리)에게 명령하여 수차를 만들게 하고 그 만드는 법을 배우게 한다면, 민간에 전해 내려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가뭄해에 대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 있어서 제일의 계책입니다. 〈고려사〉

1. 고려 시대 농업 기술의 발달 내용을 정리해 보자.

2.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나타난 농업 경영상 변화를 추론해 보자.

승려의 상공업 활동

① 고려는 도선비기에 의거하여 국가의 비보 사찰을 정하여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도록 하고, 그 절에는 사원전과 노비를 지급하였다. 그리고 귀족도 자기 가문의 절을 짓고 토지와 노비를 기증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국가적으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개최하고, 국립 여관의 구실을 하던 원을 절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② 승려들이 심부름꾼을 시켜 절의 돈과 곡식을 각 주군에 장리를 놓아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 〈고려사절요〉

③ 지금 부역을 피하려는 무리들이 부처의 이름을 걸고 돈놀이를 하거나 농사, 축산을 업으로 삼고 장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 되었다. …… 어깨를 걸치는 가사는 술 항아리 덮개가 되고, 범패를 부르는 장소는 파, 마늘의 밭이 되었다. 장사꾼과 통하여 팔고 사기도 하며, 손님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를 불러 절간이 떠들썩하다. 〈고려사〉

조선은 조세, 공납, 역의 수취 제도를 다시 정립하여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충하고, 양반 지배층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였다.

농업에서는 유교적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농서의 편찬과 보급, 수리 시설의 확충 등 안정된 농업 조건을 만들기 위한 권농 정책이 추진되었다. 상공업에서는 시전의 설치, 관영 수공업의 정비 등을 통하여 안정적으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토대 위에 점차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지방에서 장시가 출현하였다. 민간 상공업이 성장하면서 점차 관영 상공업 체제가 쇠퇴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지주 전호제가 발달하여 양반 지주들이 토지 소유를 확대하고 수취 제도가 문란해지면서 토지를 잃고 몰락해 가는 농민들로 사회적 동요가 심해졌다.

고려의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개경에 시전을 설치하여 관청과 귀족이 주로 이용하게 하였고, 경시서를 두어 상행위를 감독하였다.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 등 대도시에는 관청의 수공업장에서 생산한 물품을 판매하는 서적점, 약점과 술, 차 등을 파는 주점, 다점 등 관영 상점을 두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비정기적인 시장이 있어 도시 거주민이 일용품을 매매할 수 있었다.

지방에서는 농민, 수공업자, 관리 등이 관아 근처에 모여들어 쌀, 베 등 일용품을 서로 바꿀 수 있는 시장을 열었다. 행상들은 이런 지방 시장에서 물품을 팔거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베나 곡식을 받고 소금, 일용품 등을 판매하였다. 또, 사원에서도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과 승려나 사원 노비가 만든 수공업품을 민간에 팔았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도시와 지방의 상업 활동이 전기보다 활발해져 시전 규모도 확대되고 업종별 전문화가 나타났다. 개경의 상업 활동은 점차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으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비롯한 항구들이 교통로와 산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지방 상업에서는 행상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조운로를 따라 미곡, 생선, 소금, 도자기 등이 교역되었으며, 새로운 육상로가 개척되면서 여관인 원이 발달하여 이 곳이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국가가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소금의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또, 관청, 관리, 사원 등은 강제로 농민에게 물건을 판매하거나 구입하도록 하고 조세를 대납하는 등 농민을 강제적으로 유통 경제에 참여시켰다. 이 과정에서 상업 발달에 힘입어 부를 축적하여 관리가 되는 상인이나 수공업자도 생겨났다.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폐가 발행되었다. 성종 때에는 철전인 건원중보를 만들었으며, 숙종 때에는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었으나, 널리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통상 거래는 여전히 곡식이나 삼베를 사용하였다.

읽기자료

고려의 상업

신우(우왕) 7년(1381) 8월에 서울(개성)의 물가가 뛰어올랐는데, 장사하는 자들이 조그마한 이익을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최영이 이를 미워하여 무릇 시장에 나오는 물건은 모두 경시서로 하여금 물가를 평정(評定)하고 세인(稅印 : 세금을 바쳤다는 도장)을 찍게 하고 난 뒤에 비로소 매매하게 하였고, 도장을 찍지 않은 물건을 매매하는 자는 …… 죽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경시서에 큰 갈고리를 걸어 두고 사람들에게 보였더니 장사하는 자들이 벌벌 떨었다. 그러나 이 일은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고려사〉


고려의 화폐 정책

내(목종) 선대의 조정에서는 이전의 법도와 양식을 따라 조서를 반포하고 화폐를 주조하니, 수년 만에 돈꿰미가 창고에 가득 차서 화폐를 통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에 선대의 조정을 이어서 전폐(錢幣:돈)는 사용하고 추포(麤布:발이 굵고 바탕이 거친 베)를 쓰는 것을 금하게 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은, 국가에 이익되는 것이 아니라 한갓 백성들의 원성을 일으키는 것이라 하였다. …… 문득 근본을 힘쓰는 마음을 지니고서 돈을 사용하는 길을 다시 정하니, 차와 술과 음식 등을 파는 점포들에서는 교역에 전과 같이 전폐를 사용하도록 하고, 그 밖에 백성이 사사로이 서로 교역하는 데에는 임의로 토산물을 쓰도록 하라. 〈고려사〉

활구(은병)은 우리 나라의 지형을 본떠서 은 1근으로 만든 고가의 화폐로, 은병 하나의 값은 포 100여 필이나 되었다.

농민은 조상이 물려준 토지인 민전을 경작하거나, 국⋅공유지나 다른 사람의 소유지를 경작하였다. 또, 품팔이를 하거나 부녀자들이 삼베, 모시, 비단 등을 짜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대개 농민은 소득을 늘리려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을 배웠다. 농민이 진전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면 국가에서 일정 기간 소작료나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경작하던 주인이 방치해서 황폐해진 토지인 진전을 개간할 때, 주인이 있으면 소작료를 감면해 주고, 주인이 없으면 개간한 사람의 토지로 인정해 주었다.

12세기 이후에는 연해안의 저습지와 간척지도 개간되어 경작지가 확대되어 갔다. 특히, 강화도 피난 시기 이후에는 강화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간척 사업이 추진되었다.

수리 시설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의 수산제가 개축되었으며, 소규모의 저수지도 확충되었다.

호미와 보습 등 농기구와 종자도 개량되었다. 소를 이용한 깊이갈이가 일반화되고 시비법이 발달하면서 휴경지가 점차 줄어 계속해서 경작할 수 있는 토지가 늘었다. 밭농사는 2년 3작 윤작법이 점차 보급되었고, 논농사도 고려 말에는 직파법 대신에 이앙법(모내기)이 남부 지방 일부에 보급될 정도로 발전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이암이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소개하였고, 문익점은 목화씨를 가져와 목화 재배가 이루어졌다.


고려의 농업

○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아 험하고 평지가 적다. 그러므로 경작지가 산간에 많은데, 오르내리면서 경작하는 데 힘이 많이 들고 멀리서 보면 계단과 같다. 〈고려도경〉

○ 〔명종 18년(1182) 3월〕 때에 맞추어 농사를 권장하고 힘써 제언(堤堰)을 수축하여 저수(貯水)하고 물을 대게 하여, 황모지(荒耗地)가 없도록 하여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풍족하게 하라. 〈고려사〉

시비법(施肥法)의 발달

밭을 묵혀서 그 밭에 자란 풀을 태우거나 갈아엎어 비료를 주던 방식에서 들의 풀이나 갈대를 베어 와 태우거나 갈아엎은 녹비에 동물의 똥오줌을 풀이나 갈대와 함께 사용하는 퇴비가 만들어졌다.

고려 전기에는 관청 수공업과 소 수공업이 중심이었으나, 후기에는 민간 수공업과 사원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있던 관청에서는 그 곳에서 일할 기술자를 공장안에 올려 물품을 생산하게 하였으며, 농민을 부역으로 동원해 보조하게 하였다. 기술자는 주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무기류, 가구류, 금은 세공품, 견직물, 마구류 등을 제조하였다. 소에서는 금, 은, 철, 구리, 실, 각종 옷감, 종이, 먹, 차, 생강 등을 생산하여 공물로 납부하였다.

민간 수공업은 농촌의 가내 수공업이 중심이었다. 국가에서 삼베를 짜게 하거나 뽕나무를 심어 비단을 생산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런 이유로 농민은 삼베, 모시, 명주 등을 생산해 직접 사용하거나 공물로 바쳤다.

사원에서는 기술이 좋은 승려와 노비가 있어 베, 모시, 기와, 술, 소금 등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였다.

공장안(工匠案)은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 생산에 동원할 수 있는 기술자를 조사하여 기록한 장부이다.


고려는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관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전시과 제도를 운영하였다. 국가는 문무 관리로부터 군인, 한인에 이르기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곡물을 수취할 수 있는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를 주었다.

이 때, 지급된 토지는 수조권만 가지는 토지였다. 관직 복무와 직역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었으므로 토지를 받은 자가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관리에게 보수로 주던 과전과 달리, 문벌 귀족의 세습적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은 공음전이었다. 공음전은 5품 이상의 관료가 되어야 받을 수 있는데,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었다. 이는 음서제와 함께 귀족의 지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었다.

한인전은 6품 이하 하급 관료의 자제로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지급한 토지인데, 이것은 관인 신분의 세습을 위한 것이다. 군인전은 군역의 대가로 주는 토지였다. 군인전은 군역이 세습됨에 따라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하급 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하여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왕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내장전을 두었다.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는 공해전을 지급하여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고, 사원에는 사원전을 지급하였다.

민전은 매매, 상속, 기증, 임대 등이 가능한 사유지로서, 귀족이나 일반 농민의 상속, 매매, 개간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또, 소유권이 보장되어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토지였으며, 민전의 소유자는 국가에 일정한 세금을 내야 했다. 대부분의 경작지는 개인 소유지인 민전이었지만, 왕실이나 관청의 소유지도 있었다.

점차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세습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전시과 제도가 원칙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다시 분배해야 할 토지를 세습하는 것이 용인되면서 조세를 거둘 수 있는 토지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런 폐단은 무신정변을 거치면서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고려 말에는 국가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과전(科田)은 문⋅무반 관료에게 지급한 토지이다.

전시과의 운영

전시과 제도는 경종 때 처음 만들어졌다.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지급량을 줄이고, 문종 때에는 지급 대상을 현직 관료로 제한하였다.

귀족의 경제 기반은 대대로 상속받은 토지와 노비, 관료가 되어 받은 과전과 녹봉 등이 있었다.

관리가 된 귀족은 과전에서 생산량의 10분의 1을 거두었으며, 녹봉으로 1년에 두 번씩 곡식이나 비단을 받았다.

귀족은 자신의 소유지를 노비에게 경작시키거나 소작을 시켜 생산량의 반을 거두었다. 또, 외거 노비에게 신공으로 매년 베나 곡식을 받았다. 귀족은 권력이나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기도 하고, 헐값에 사들이거나 개간을 하여 토지를 늘렸다. 이렇게 늘어난 토지를 농장이라 하였고, 대리인을 보내 소작인을 관리하고 소작료를 거두어 갔다.

이러한 수입을 기반으로 귀족은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문벌 귀족이나 권문세족은 큰 누각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방에 별장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외출할 때에는 남녀 모두가 시종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다녔으며, 중국에서 수입한 차(茶)를 다점에서 즐기기도 하였다.


귀족의 생활

김돈중 등이 절의 북쪽 산은 민둥하여 초목이 없으므로 그 인근의 백성을 모아 소나무, 잣나무, 삼나무, 전나무와 기이한 꽃과 이채로운 풀 등을 심고 단을 쌓아 임금의 방을 꾸몄는데, 아름다운 색채로 장식하고 대의 섬돌은 괴석(怪石)을 사용하였다.

하루는 왕이 이 곳에 행차하니, 김돈중 등이 절의 서쪽 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휘장, 장막과 그릇 등이 몹시 사치스럽고 음식이 진기하여 왕이 재상, 근신들과 더불어 매우 흡족하게 즐겼다. 〈고려사〉

녹봉(祿俸)은 관료를 47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400석을 받고, 최하 47등급은 10석을 받았다.

신공(身貢)은 노비가 주인에게 제공하는 노동력이나 물품이다.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수취 체제를 정비하면서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간 수공업으로 발전해 갔다. 송, 원을 중심으로 거란, 여진, 일본 등과 무역을 전개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농민의 생활 안정과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농업을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개간한 땅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면세하여 줌으로써 개간을 장려하고, 농번기에는 잡역 동원을 금지하여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였다. 재해를 당했을 때에는 세금을 감면해 주고, 고리대의 이자를 제한하였으며, 의창제를 실시하는 등 농민 안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고려는 개경에 시전을 만들었고, 국영 점포를 열었다. 아울러 화폐처럼 유통되는 곡물이나 삼베를 대신하여 쇠, 구리, 은 등을 금속 화폐로 만들어 유통하는 등 상업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수공업은 관청에 기술자를 소속시켜 무기, 비단 등 왕실과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는 형태였으며, 민간 기술자나 일반 농민을 동원하여 생산을 보조하게 하였다. 소(所)에서도 먹, 종이, 금, 은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여 공물로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자급자족적인 농업 경제를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은 부진하였다.


고려의 농업 장려 정책

○ 임금(태조)이 명령을 내리기를 “…… (몰락한 사람들에게) 조세를 면제해 주고 농업을 권장하지 않으면, 어찌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될 수 있으랴. 백성에게 3년 동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고,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자는 농토로 돌아가게 하며, 곧 대사면을 행하여 함께 휴식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 진전(황폐해진 경작지)을 개간하여 경작하는 자는, 사전(개인 소유지)의 경우 첫해에는 수확의 전부를 가지고, 2년째부터 경작지의 주인과 수확량을 반씩 나눈다. 공전(국가 소유지)의 경우에는 3년까지 수확의 전부를 가지고, 4년째부터 법에 따라 조(租)를 바친다. 〈고려사〉

고려는 신라 말의 문란한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고려는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를 조사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과 호구 장부인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조세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비옥한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부과하였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이었다. 거둔 조세는 각 군현의 농민을 동원하여 조창까지 옮긴 다음, 조운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하여 보관하였다.

공물은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는 제도이다.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나누어 주현에 부과하면, 주현은 속현과 향, 부곡, 소에 이를 할당하고, 각 고을에서는 향리들이 집집마다 공물을 거두었다. 공물의 종류로는 매년 내어야 하는 상공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거두는 별공이 있었다.

역은 국가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제도로,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여 의무를 지게 하였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밖에, 어민에게 어염세를 거두거나 상인에게 상세를 거두어 재정에 사용하였다.

이런 수취 제도를 기반으로 고려는 재정 운영의 원칙을 세우고, 국가와 관청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수조권을 나누어 주었다.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으로는 호부와 삼사를 두었다. 재정은 관리의 녹봉, 일반 비용, 국방비, 왕실 경비 등에 지출하였다. 각 관청은 관청 운영 경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토지를 지급받았으나, 경비가 부족한 경우에는 그 비용을 각 관청에서 스스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수취 제도

○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를 올리기를 ……“(고려) 태조가 즉위한 지 34일 만에 여러 신하를 맞이하면서 ‘최근 백성에 대한 수탈이 가혹해지면서 1결의 조세가 6석에 이르러 백성의 삶이 너무 어려우니, 나는 이를 매우 가련하게 여긴다. 지금부터 마땅히 10분의 1세로 하여 밭 1부의 조를 3되로 하여라.’라고 한탄하여 말하였는데 …….”라고 하였다. 〈고려사〉

○ 편성된 호는 인구와 장정이 많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부역을 시킨다. 〈고려사〉

양안(量案)은 경작지의 소유자와 크기를 적은 토지 대장이다.

호적(戶籍)은 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등재하되, 때에 따라서는 여러 세대의 가족이 한 호적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조창(漕倉)은 조운할 곡식을 모아 보관하는 창고이다.

수조권은 토지에서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이다.

발해의 경제 발달

발해의 수취 제도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 콩, 보리 등 곡물을 거두는 조세, 베, 명주, 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두는 공물, 궁궐, 관청 등의 건축에 농민들을 동원하는 부역이 있었다. 발해의 귀족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밭농사가 중심이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었다. 수렵도 활발해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되었다. 수공업은 철, 구리, 금은 등 금속 가공업과 삼베, 명주, 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 그리고 수도인 상경 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발해는 당,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특히, 당과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일본과의 무역도 규모가 한 번에 수백 명이 오갈 정도로 활발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

토지와 농민을 둘러싼 국왕과 귀족 간의 갈등


① 재상가에는 녹(祿)이 끊이지 않았다. 노동(奴僮)이 3000명이고, 비슷한 수의 갑옷과 무기, 소, 말, 돼지가 있었다. 바다 가운데 섬에서 길러 필요할 때에 활로 쏘아서 잡아먹었다. 곡식을 꾸어서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신당서〉

② ⋅ 신문왕 7년(687) 5월에 문무 관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 신문왕 9년(689) 1월에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租)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여 이로써 영원한 법식을 삼았다.

⋅ 성덕왕 21년(722) 8월에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 경덕왕 16년(757) 3월에 여러 내외관의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나누어 주었다.

⋅ 소성왕 원년(799) 3월에 청주 거노현으로 국학생의 녹읍을 삼았다. 〈삼국사기〉


해상 세력의 성장

①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을 찾아보고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널리 우리 나라 사람을 노비로 삼으니, 청해진을 만들어 적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청해는 신라의 요충으로 지금의 완도를 말하는데, 대왕은 그 말을 따라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해상을 방비하게 하니, 그 후로는 해상으로 나간 사람들이 잡혀가는 일이 없었다. 〈삼국사기〉

② 청해진 대사 궁복(장보고)이 자기 딸을 왕비로 맞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 (문성왕) 13년(851) 2월에 청해진을 파하고, 그 곳 백성을 벽골군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통일 후 신라의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농업 생산력의 성장을 토대로 경주의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 생산이 늘어나 이전에 설치된 동시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였다. 국가는 왕실과 귀족이 사용할 금은 세공품, 비단류, 그릇, 가구, 철물 등을 만들기 위한 관청을 정비하여 이에 속한 장인과 노비에게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게 하였다.

통일 후 당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무역이 번성하였고, 공무역뿐 아니라 사무역도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일본과 교류를 제한하여 무역이 성행하지 못하였으나, 8세기에 이르러 활발해졌다.

한편, 국제 무역이 발달하면서 이슬람 상인이 울산에까지 와서 무역하였다.

8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무역 활동이 활발해져,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무역 확대로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류에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과 신라촌, 신라인을 다스리는 신라소, 여관인 신라관, 절인 신라원이 만들어 졌다.

통일이 되면서 왕실과 귀족은 이전보다 풍족한 경제 기반을 가졌다. 왕실은 삼국의 경쟁 과정에서 새로 획득한 땅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국가의 수입 중 일부를 왕실의 수입으로 삼았다.

귀족은 식읍과 녹읍을 통하여 그 지역의 농민을 지배하여 조세와 공물을 거두었고,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귀족은 국가에서 준 토지와 곡물 이외에 물려받은 토지, 노비, 목장, 섬도 가지고 있었다. 서민을 상대로 한 고리대업도 수입원의 하나였다. 귀족은 당이나 아라비아에서 수입한 비단, 양탄자, 유리그릇, 귀금속 등 사치품을 사용하였다. 당시 귀족은 당의 유행을 따라 옷을 입을 정도였으며, 경주 근처에 호화스러운 별장을 짓고 살았다.

통일 이후 사회 안정으로 농업 생산력이 늘어났으나 한계가 많았다. 당시는 시비법이 발달하지 못하여 계속해서 경작할 수 없었고, 1년 또는 몇 년을 묵혀 두었다가 경작해야 하였다. 대체로, 비옥한 토지는 왕실, 귀족, 사원 등 세력가가 가졌고, 농민의 토지는 대부분이 척박하여 생산량이 귀족의 것보다 적었다.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세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것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은 생계를 유지하려면 남의 토지를 빌려 경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수확량의 반 이상을 토지 소유자에게 주어야 하였다.

전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였지만, 그 밖에 삼베, 명주실, 과실류 등 여러 가지 물품을 공물로 내고 부역도 많아 농사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군역에 나가면 농사지을 노동력이 없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농민도 많았다.

향이나 부곡에 사는 사람은 일반 농민보다 어려운 형편이었다. 농민과 대체로 비슷한 생활을 하였으나, 농민보다 더 많은 공물 부담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노비는 왕실, 관청, 귀족, 절 등에 속하여 있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하여 음식, 옷 등 각종 필수품을 만들고 일용 잡무를 하였으며, 주인을 대신하여 농장을 관리하거나 주인의 땅을 경작하였다.


통일 신라의 평민

진정법사는 신라 사람으로, 출가하기 전 군역에 나가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장가도 가지 못하고 동원되었는데, 남는 시간에 날품팔이를 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에 있는 재산이라고는 한쪽 다리가 부러진 솥뿐이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문 앞에 와서 절을 짓는데 필요한 철을 구하자, 그 어머니는 이 솥을 시주하였다. 〈삼국유사〉

삼국 시대의 귀족은 본래 스스로 소유하였던 토지와 노비 외에도 국가에서 준 녹읍, 식읍, 노비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은 전쟁에 참여하면서 토지와 노비 등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

귀족은 노비와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농민을 동원하여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시키고, 그 수확물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그리고 고리대를 이용하여 농민의 토지를 빼앗거나 농민을 노비로 만들어 재산을 늘려 갔다.

귀족은 기와집, 창고, 마구간, 우물, 주방 등을 갖추고 높은 담을 쌓은 집에서 살면서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에서 수입된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보석과 금, 은으로 치장하였다.


고구려의 귀족과 평민

○ 그 나라는 3만 호인데, …… 그 중에서 대가(大家)들은 경작하지 않고 먹는 자가 1만 명이나 되며, 하호는 먼 곳에서 쌀, 낟알, 물고기, 소금 등을 져서 날라다 대가에 공급하였다. 〈삼국지〉

○ 대가들은 경작을 하지 않고 하호들은 부세를 바치며 노비와 같다. 〈위략〉

녹읍(祿邑)

국가에서 관료 귀족에게 지급한 일정 지역의 토지로서, 조세를 수취할 뿐만 아니라 그 토지에 딸린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식읍(食邑)

국가에서 왕족, 공신 등에게 준 토지와 가호로서, 조세를 수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농민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부유한 자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였다. 퇴비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대부분의 토지에서 계속 농사짓지 못하고 1년 또는 수년 동안 묵혀 두어야 하였다.

농기구는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과 일부분을 철로 보완한 것을 사용하다가 4, 5세기를 지나면서 철제 농기구가 점차 보급되었다. 쟁기, 호미, 괭이 등 철제 농기구가 6세기에 이르러 널리 사용되었으며, 우경도 점차 확대되었다.

농민은 국가와 귀족에게 곡물, 삼베, 과실 등을 내야 했고, 성이나 저수지를 쌓는 일, 삼밭을 경작하고 뽕나무를 기르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지방 농민은 전쟁 물자를 조달하거나 잡역부로 동원되었으며, 전쟁에 군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농민은 스스로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계곡 옆이나 산비탈 등을 경작지로 바꾸어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하지만, 자연 재해를 당하거나 고리대를 갚지 못하는 경우에는 몰락하여 노비, 유랑민,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삼국을 통일하면서 이전보다 넓은 토지와 많은 농민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신라는 삼국의 경쟁 시기와는 다른 경제적 조치를 취하였다.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 정도를 수취하여 통일 이전보다 완화하였다. 공물은 촌락 단위로 그 지역의 특산물을 거두었다. 역은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졌으며,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신라는 촌락의 토지 크기,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토산물 등을 파악하는 문서를 만들고, 조세, 공물, 부역 등을 거두었으며, 변동 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문서를 다시 작성하였다.

신라는 토지 제도를 바꾸어 식읍을 제한하고 녹읍도 폐지하였으며,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아울러 이전부터 시행해 오던 구휼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런 조치는 귀족에 대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민정(촌락) 문서의 내용

토지는 논, 밭, 촌주위답, 내시령답 등 토지의 종류와 면적을 기록하고, 사람들은 인구, 가호, 노비의 수와 3년 동안의 사망, 이동 등 변동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밖에, 소와 말의 수,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의 수까지 기록하였다.

특히, 사람은 남녀별로 구분하고, 16세에서 60세의 남자의 연령을 기준으로 나이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호(가구)는 사람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기록된 4개 촌은 호구 43개에 총인구는 노비 25명을 포함하여 442명(남 194, 여 248)이며, 소 53마리, 말 61마리, 뽕나무 4249그루 등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민정 문서

1933년 일본 도다이 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통일 신라 때의 문서로, 당시 촌락의 경제 상황과 국가의 세무 행정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신라 장적, 신라 촌락 문서라고도 한다.

경제는 인간 생활의 기초로서 인간의 삶을 가장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떻게 살았을까 또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등 생활에 관련된 의문을 해결하려면, 그 당시 살던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들을 알아야 한다.

우리 조상들도 다른 민족과 같이 좀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바로 모든 사람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 까닭은 당시의 생산력 수준, 토지와 생산 도구의 소유 형태, 잉여 생산물의 수취 방식, 경제 정책 등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지배층의 가혹한 수취나 자연 재해 등 농민 생활을 악화시킬 수 있는 조건과 농민 스스로의 노력, 정부의 권농 정책과 사회 정책 등 농민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조건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을 변화시켜 왔다.

경제사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과정을 살피면서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모습을 이해하고,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삼국은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군사력과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다. 수취 제도 정비, 철제 농기구 보급, 우경 장려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여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였고, 농민 생활도 점차 향상되어 갔다. 왕실과 귀족의 필요에 따라 높은 수준의 기술이 있어야 생산할 수 있는 물품도 제조되었다.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생산력 향상은 잉여 생산물을 증가시켜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게 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국내 정세가 안정되고 농업 생산력이 증대됨에 따라 농민의 생활도 나아지고, 수공업과 상업 및 무역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신라 말에 이르러 중앙 정치의 혼란으로 지배층이 농민에 대한 수취를 점차 가혹하게 하면서 농민 경제가 침체되고 사회가 동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점차 성장하여 독자적인 경제 영역을 형성하고,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켰으며, 무역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는 등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고 있었다.

삼국은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소국과 전쟁을 벌여 정복한 지역에는 그 지역의 지배자를 내세워 토산물을 공물로 수취하였다. 또, 삼국은 전쟁 포로를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나누어 주기도 하고, 군공을 세운 사람에게 일정 지역의 토지와 농민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면서 조세 제도를 마련하였다. 조세는 대체로 재산의 정도에 따라 호를 나누어 곡물과 포를 거두었으며, 그 지역의 특산물도 거두었다. 왕궁, 성, 저수지 등을 만드는 데에 노동력이 필요하면 국가에서 15세 이상의 남자를 동원하였다.

아울러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시책과 구휼 정책을 시행하였다. 철제 농기구를 일반 농민에게 보급하여 소를 이용한 우경을 장려하고, 황무지 개간을 권장하여 경작지를 확대하였으며,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리하여 가뭄에 대비하였다.

또, 삼국은 노비 중에서 기술이 뛰어난 자에게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무기, 장신구 등을 생산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기, 비단 등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관청을 두고 여기에 수공업자를 배정하여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농업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 수도 같은 도시에서만 시장이 형성되었다. 신라는 5세기 말 경주에 시장을 열어 물품을 매매하게 하였고, 6세기 초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삼국의 국제 무역은 4세기 이후에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남북조 및 유목민인 북방 민족과 무역을 하였다. 백제는 남중국 및 왜와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획득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하여 중국과 무역을 하였으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이후에는 당항성을 통하여 직접 교역하였다.


삼국의 수취 제도

○ 세(인두세)는 포목 5필에 곡식 5섬이다. 조(租)는 상호가 1섬이고, 그 다음이 7말이며, 하호는 5말을 낸다.(고구려) 〈수서〉

○ 세는 포목, 명주실과 삼, 쌀을 내었는데,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받았다.(백제) 〈주서〉

○ 2월 한수 북부 사람 가운데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백제) 〈삼국사기〉

북한에서는 6⋅25 전쟁을 거치면서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 등을 숙청하면서 권력 기반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 시기에 북한은 전후 복구와 자립적 민족 경제 확립을 목표로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아 중공업과 경공업을 모두 발전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업 분야에서는 협동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대시키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한⋅미⋅일 안보 체제 구축과 중⋅소 분쟁 등 국제 정세의 악화로 위기에 놓인 북한은 군수 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아울러 김일성과 노동당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주체 노선을 강조하였다. 대남 정책에서는 남북 연방제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지만, 한편으로 무장 군인을 남파하는 등 무력 도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는 7⋅4 남북 공동 성명 직후 헌법을 개정하여 국가 주석이 행정 및 군사 분야의 최고 지도자로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 주석제를 도입하였다(1972. 12.).

1980년대에 들어서는 김정일이 당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후계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1993년에는 김정일이 국방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한 후 권력을 승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0년대 북한 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갔다. 특히, 1990년 이후에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 외국에서 식량 원조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홍수 등 자연 재해의 발생, 외부 원조의 감소, 에너지 자원의 부족, 사회 간접 자본 낙후, 자립 경제 고수, 주체 사상과 수령 유일 체제의 비합리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북한은 외국 기업과의 합작과 자본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주체 노선

정치의 자주, 경제의 자립, 국방의 자위


광복 이후 통일 국가의 수립이 좌절되면서 민족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는 일은 우리 민족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정책과 북한의 적화 통일 정책으로 남북한 사이에는 통일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4⋅19 혁명 직후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 협상론, 남북 교류론 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통일 논의는 그 후의 남북한 대립 등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냉전 체제의 완화, 남한의 경제 발전 등 국내외 여건의 변화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남북 교류를 제의하고, 남북 간에 이산 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적십자 대표의 예비 회담을 열었다. 또, 서울과 평양에서 7⋅4 남북 공동 성명이 동시에 발표되었다(1972). 이 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내세운 것으로, 이후 통일 논의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남한의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과 북한의 고려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 방안이 제시되었으며, 남북한의 이산 가족이 각각 서울과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1985. 9.).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이 추진되었다.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 체육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곧이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고(1991. 12.),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한편,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와 민간 차원의 교류가 크게 확대되었다. 마침내 평양에서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2000). 또, 금강산 관광과 경의선 연결, 남북 이산 가족 상봉 등이 실현되어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었다.

노무현 정부도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2007년 평양에서 정상 회담(10. 2~4)을 가져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하였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 정책을 표방하였다.


6⋅15 남북 공동 선언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 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7월 4일에 발표된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간 합의 문서.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북한도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을(서울 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4월 혁명 제1 선언문)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지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 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 보라 !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원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추(鐵鎚)하에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② 우리는 이제 3선 개헌을 강행하여 자유 민주에의 반역을 기도하는 어떤 명분이나 위장된 강변에도 현혹됨이 없이 헌정 20년간 모든 호헌 세력들의 공통된 신념과 결단 위에서 전 국민의 힘을 뭉쳐 단호히 이에 대처하려 한다. 집권자에 의해서 자유 민주에의 기대가 끝내 배신당할 때, 조국을 수호하려는 전 국민은 요원의 불길처럼 봉기할 것이다. 우리는 날로 그 우방을 확장시키고 있고, 선악의 대결과 진부(眞否)의 결전에서 용솟음치는 결의를 가지고 있다.

자유 국민의 조국은 영원하다.

영원한 조국을 가진 국민은 용감하다.

전 국민이여 ! 자유 민주의 헌정 수호 대열에 빠짐없이 참여하라.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

③ 6⋅10 대회 선언문

오늘 우리는 전세계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디딘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 호헌 조치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 〈호헌 반대 민주 헌법 쟁취 운동 본부〉

이승만 정부는 출범 초기에 좌익 게릴라 활동, 실업과 물가 폭등 등으로 어려움에 처하였다. 더욱이 미군이 철수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북한, 중국, 소련의 동맹 관계가 굳건해지는 등 국제 정세도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하에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감행하였다.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바뀌어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이후,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국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진행되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3년간 계속된 6⋅25 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전쟁 고아, 이산 가족이 발생하였으며,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남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 감정이 높아져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유엔 참전국(16개국)은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였다.

6⋅25 전쟁의 와중에 이승만 정부는 발췌 개헌을 강행하였고, 이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하여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마침내 국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터지면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헌법으로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장면 내각은 민주당 내의 정치적 갈등과 계속되는 시위에 시달렸다. 그러나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는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지만, 박정희 등 군부 세력의 정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961. 5. 16.).

군부 세력은 비상 계엄하에서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반공 강화와 민생 안정 등을 표방한 혁명 공약을 발표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군에 복귀하지 않은 채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였고, 이를 토대로 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거 등을 거쳐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1963).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고,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사과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억누르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1965). 또,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1967년 선거에서 재선된 박정희는 3선 개헌을 강행하였고(1969), 1972년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10월 유신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민주적 헌정 체제를 부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면서 장기적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유신 체제를 부정하고 헌법을 비방하거나 개정을 요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긴급 조치를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러나 양심적 지식인, 학생, 종교인 등은 이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은 10⋅26 사태로 피살되었고,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하였다(1979).

이후, 국민은 민주화를 요구하였으나, 12⋅12 사태로 군사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이를 억압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계엄령 철폐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시작된 5⋅18 민주화 운동도 무장 군인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5⋅18 민주화 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언론 통폐합, 삼청 교육대 등으로 인권을 유린하기도 하였다.

발췌 개헌(1952)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여당이 주장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골자로 하고, 야당이 주장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발췌, 절충하였다.

사사오입 개헌(1954)은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횟수 제한 없이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개헌안이 국회 표결 결과 1표 차이로 부결되었으나, 이틀 후에 반올림(사사오입)을 내세워 통과시켰다.

유신 체제(維新體制)는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와는 달리 강력한 통치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 특히,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는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여 박정희의 영구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신군부의 집권 기도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광주에서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의 과잉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에 시민군이 결성되어 계엄군과 시가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시민과 학생이 희생되었다.

전두환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하에서도 계속된 민주화 요구는, 1987년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과 4⋅13 호헌 조치를 계기로 6월 민주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직선제 개헌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정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고, 여야 합의에 의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권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및 소련,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고, 유엔에 남북한이 함께 가입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채 통치 기간 중에 발생한 부정과 비리로 국민적 지지를 제대로 얻지 못하였다.

1993년에 성립된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등을 법제화하여 부정부패 척결에 노력하였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신군부 세력을 법정에 세우고, 5⋅16 군사 정변 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집권 말기에 국제 경제 여건의 악화와 외환 부족으로 인하여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1998년에 성립된 김대중 정부는 외환 위기 극복 및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천명하였고, 남북 평화 정착을 위한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2000년 6⋅15 남북 정상 회담을 실현하였고, 남북 경제 협력의 활성화와 금강산 관광, 이산 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2003년에 성립된 노무현 정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등을 국정 목표로 제시하였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선진 일류 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잘사는 국민, 따뜻한 사회, 강한 나라를 추구하며, 섬기는 정부, 활기찬 시장 경제, 능동적 복지, 인재 대국, 성숙한 세계 국가를 국정 지표로 삼고 있다.

4⋅13 호헌 조치

전두환 정부는 1987년 4월 13일에 담화문을 발표하여 국민이 열망했던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외면하고, 사회 혼란을 구실로 대통령 간선제의 헌법을 고수하려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동시에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 투쟁을 전개한 결과였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준비해 왔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규정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인 중국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이나 만주 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단체, 그리고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 건국 동맹도 각각 민주 공화국 건설을 위한 원칙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광복의 감격과 각계각층의 건국 운동이 곧바로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소의 분할 점령과 함께 우리 민족도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좌우의 대립은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에, 신탁 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안에 찬성한 좌익이 대립하게 되어, 결국 자주 독립의 통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민족 분단의 길로 가게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임시 정부의 한국 독립당에서 일본의 패망에 대비하여 조소앙이 제창한 삼균주의를 채택하여 1941년 제정, 공포한 것이다.

신탁 통치(信託統治)는 한민족이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미⋅영⋅중⋅소 4개국이 한반도를 최고 5년간 공동 관리하겠다는 방안이였다.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으나, 협의 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 문제 등으로 결렬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 등 우익 세력은 자신들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고, 중도 세력은 미군정의 후원하에 좌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였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후, 한반도 문제는 유엔에 이관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다. 소련이 이에 반대하자,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다. 분단을 우려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실패하였다(1948. 4.).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비밀 선거인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국회에서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정신과 건국 이념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8. 15.). 이로써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 국가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은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특히,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어 제주도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 등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국면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반공 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농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제헌 국회에서는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1948. 9.).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친일파 처벌은 좌절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하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어 토지 개혁,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을 단행하였다. 이후,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에서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세워졌다(1948. 9. 9.).

제주도 4⋅3 사건(1948)은 제주도에서 벌어진 단독 선거 반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인명 피해가 일어난 사건이다.

여수⋅순천 10⋅19 사건(1948)은 제주도 4⋅3 사건의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 일대를 점령한 사건이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이 고조되어 1948년 8월, 헌법 제101조에 의거, 국회에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특별 위원회(반민 특위)가 구성되고, 9월 22일, 법률 제3호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통과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국민 국가 건설을 효과적으로 준비할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서울과 연해주, 상하이에 각각 정부가 조직되었고, 마침내 이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 9.).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민주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 분립 헌정 체제를 갖추었다.

초기의 임시 정부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과 임무를 담당하였다. 또, 연통제와 교통국 등을 통하여 독립 운동 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기여하였다.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임시 정부는 애국 공채를 발행하고,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민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부로 기능하였다. 이와 아울러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을 통할하는 중심 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연통제(聯通制)

임시 정부가 국내의 독립 운동을 연결하기 위해 설치한 비밀 연락 조직으로,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교통국(交通局)

임시 정부의 통신 기관.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경제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친일파를 육성하는 한편, 민족주의 세력을 회유하여 민족 운동을 약화시켰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은 자치 운동 문제를 둘러싸고 타협적인 세력과 비타협적인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도 활발해지면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신간회가 조직되었다(1927). 신간회는 자치론의 확산을 우려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협동 전선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이들은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어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기회주의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실시와 생활 개선 등을 주장하고, 노동 쟁의나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을 지원하였다.

이 시기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중 계몽 활동과 일제의 차별 교육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운동 세력과 연결되어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1926).

또, 한⋅일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을 계기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1929).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국권을 빼앗긴 후에 애국 지사들은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 집단 거주지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항일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먼저 각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청소년에게 민족 교육과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 등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연해주의 자유시로 옮겨 갔으나, 적색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였다(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참의부는 임시 정부가 직할하였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독립군은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들 부대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에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또,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거를 일으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거나,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 애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거나 일본인 고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이봉창과 윤봉길이었다.

한편, 1937년에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위협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각처에 흩어져 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후 한국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였다. 또, 미국과 협조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밖에, 만주의 일부 조선인들은 1930년대에 항일 유격대를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계통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조를 얻어 조선 의용대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조선 의용대에서 분화된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 계열은 조선 의용군을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문(1941. 12.)

우리는 3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 영, 미, 소, 캐나다, 기타 제국의 대일 선전이 일본을 격패케 하고 동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하하며, 이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 전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 단위로서 추축국에 선전한다.

2. 1910년 합병 조약과 일체의 불평등 조약의 무효를 거듭 선포하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인 한국에 있어서의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3.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 세력하에 조성된 창춘 및 난징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 처칠 선언의 각 조를 견결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것을 적용하여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축원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신간회 강령

-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간도 참변(1920)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이 간도 일대에서 동포 1만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개소를 불태운 사건

3부의 활동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재만 동포의 자치 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자체의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여 국경을 넘나들며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식민 통치를 강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완전하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1910년대에 일제는 무단 통치를 행하여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빼앗고, 독립 운동을 탄압하였다. 또, 일제는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사소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즉결 심판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이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하였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 수와 장비 등 경찰력은 오히려 강화하였다. 또, 일제는 소수의 친일 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족 운동가들도 회유하는 한편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1930년대에 일제는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읽기자료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

일본 제국주의는 1932년 무렵부터 침략 전쟁을 확대해 가면서, 점령 지구에서 “군인들의 강간 행위를 방지하고, 성병 감염을 방지하며, 군사 기밀의 누설을 막는다.”라는 구실로 우리 나라와 중국, 타이완 및 점령 지역의 10만~20만 명에 이르는 여성을 속임수와 폭력을 통해 연행하였다. 이들은 만주, 중국,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과 일본, 한국 등에 있는 점령지에서 인권을 박탈당한 성적 행위를 강요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귀국하지 않은 피해자 중에는 현지에 버려지거나, 자결을 강요당하거나 학살당한 경우도 있다. 운 좋게 생존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사회적인 소외와 수치심, 가난, 병약해진 몸으로 인해 평생을 신음하며 살아가야 했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교육 자료 1〉

조선 총독


조선 총독은 일본군 현역대장 또는 대장 출신자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국왕에 직속되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였다.

내선 일체(內鮮一體)


내는 일본, 선은 조선을 가리킨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뜻으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화도 민족 차별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하였다.

황국 신민 서사(皇國臣民誓詞)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한다.”는 내용이다.

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광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강점 이후 일제의 무단 통치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던 민족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제창된 민족 자결주의와,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독립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언하였다(1919. 3. 1.).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운동은 학생, 종교인, 상인, 노동자가 참가하면서 점차 지방 도시로 확산되었고, 뒤이어 전국 각지의 농촌으로 파급되었다.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 식민 통치 기관,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또, 3⋅1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탄압하였다.

3⋅1 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으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에 큰 자극이 되었다.

일제의 3⋅1 운동 탄압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이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을 교회에 집합,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만 명이며, 일본 군경에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당한 사람은 15,850명, 체포된 사람은 45,306명이었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일제의 주권 침탈에 대해 각계각층에서는 일제와 을사 5적을 규탄하고, 조약 폐기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중근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고, 장인환과 전명운은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의병 전쟁도 을사조약을 계기로 확산되었다. 이 때,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항쟁은 한층 고양되었다. 해산 군인이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활동 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의 화력에 비해 열세였고, 의병을 주도한 양반 유생층과 평민 의병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의병은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1908). 이를 계기로 의병은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

의병 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대표적인 구국 운동이었다.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하였다는 점과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하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편, 여러 종류의 사회단체도 설립되어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 정치 체제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 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의 단체들이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중에서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 정치 체제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비밀 조직이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의 건설 등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였으나,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전개되어 항일 투쟁의 성과면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 독립 운동의 이념과 전략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민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대한 자강회 취지서

무릇 우리 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의 여하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 대한이 종전에 자강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이 스스로 우매함에 묶여 있고 국력이 쇠퇴하여 마침내 오늘의 위기에 다다라, 결국 외국인의 보호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자강의 도에 뜻을 다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 자강의 방법을 생각해 보면, 다름 아니라 교육을 진작함과 식산흥업에 있다. 무릇 교육이 일어나지 못하면 백성의 지혜가 열리지 못하고, 산업이 늘지 못하면 국부가 증가하지 못한다. 〈대한 자강회 월보〉

105인 사건

1911년, 일제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 배일 기독교 세력과 신민회의 항일 운동을 탄압하려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조작하여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중심 인물 105인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일제는 제1차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 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러⋅일 전쟁, 1904). 대한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한⋅일 의정서를 강제적으로 체결하여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꾀하였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어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제는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을사조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하였다(1905).

일제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군대마저 해산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1907). 그리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1910).

한편,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울릉도에 딸린 섬이었던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제국을 계승한 우리의 영토이다.

또, 일제는 청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얻어 내는 대가로 간도 지방에 대한 관리 권한을 청에 넘겨주었다. 19세기에 이르러 토문강 위치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조선과 청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간도는 우리의 외교권이 불법적으로 상실된 상태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 협약(1909)에 따라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간도 협약

제1조 일⋅청 두 나라 정부는 토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천지에 있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

제3조 청 정부는 이전과 같이 토문강 이북의 개간지에 한국 국민이 거주하는 것을 승인한다. 그 지역의 경계는 별도로 표시한다.

제5조 토문강 이북의 한국인과 청국인이 함께 살고 있는 구역 안에 있는 한국 국민 소유의 토지와 가옥은 청 정부가 청 국민의 재산과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

제6조 청 정부는 앞으로 길장 철도(吉長鐵道)를 연길 이남으로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에서 한국의 철도와 연결할 수 있다. 〈순종실록, 1909. 9. 4.〉

고종과 을사조약

을사조약은 제2차 한⋅일 협약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무력적인 강압 속에서 이에 동조한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이 찬성하여 체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조약의 과정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고, 고종이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은 성립될 수 없다.

간도 귀속 문제

간도 협약에 따라 일제는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해 주었으나, 최근 토문강과 두만강이 별개의 강이라는 각종 자료가 발굴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간도의 귀속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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