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침입과 격퇴,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 몽골과의 전쟁
10세기 초에 통일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과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다.
처음에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993). 그러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구실로 두 차례 더 침략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잘 막아 냈다. 특히, 강감찬은 거란이 세 번째 침략해 왔을 때, 살아 돌아간 거란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귀주 대첩, 1019).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 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수 없었고, 송을 침략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강동 6주의 6주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주),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다.
고려의 동북방에는 한때 말갈이라 불리던 여진족이 부족 단위로 흩어져 반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려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정책을 펴서 포섭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다음,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그러나 여진족은 그 후에 더욱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을 건국하였으며,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편성되었다.
동북 9성은 위치가 함흥이라는 설과 두만강 일대라는 설이 있다. 9성 설치 이후 여진족의 침입이 이어지자,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려주었다.
13세기 초,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변하였다. 몽골이 금을 공격하고 북중국을 점령하자, 고려와 몽골의 접촉도 시작되었다. 고려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일삼던 몽골은,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사신이 귀국길에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이로부터 고려는 40년 동안 몽골과 전쟁을 벌였다(1231~1270).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이 기간에 김윤후가 이끈 민병과 승군이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撒禮塔)의 군대를 물리치는 등 일반 민중의 항쟁이 이어졌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까지도 몽골에 대항하여 싸웠다.
고려 조정에서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났다. 몽골은 고려를 완전 정복하겠다는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안겨 준 결과였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몽골과의 전쟁때 처음 충주 부사 우종주가 매양 장부와 문서로 인하여 판관 유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몽골병이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성 지킬 일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의견상 차이가 있어서 우종주는 양반 별초(兩班別抄)를 거느리고, 유홍익은 노군(奴軍)과 잡류 별초(雜類別抄)를 거느리고 서로 시기하였다. 몽골병이 오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 등과 함께 다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오직 노군과 잡류만이 힘을 합하여 쳐서 이를 쫓았다. 〈고려사〉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의 멸망 (0) | 2017.04.23 |
---|---|
원의 내정 간섭,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신진 사대부의 성장 (0) | 2017.04.23 |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무신 정권의 성립 (0) | 2017.04.23 |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관리 등용 제도,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0) | 2017.04.23 |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중앙 정치 조직 (0) | 2017.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