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 초에 통일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과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다.

처음에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993). 그러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구실로 두 차례 더 침략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잘 막아 냈다. 특히, 강감찬은 거란이 세 번째 침략해 왔을 때, 살아 돌아간 거란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귀주 대첩, 1019).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 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수 없었고, 송을 침략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강동 6주의 6주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주),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다.

고려의 동북방에는 한때 말갈이라 불리던 여진족이 부족 단위로 흩어져 반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려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정책을 펴서 포섭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다음,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그러나 여진족은 그 후에 더욱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을 건국하였으며,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편성되었다.

동북 9성은 위치가 함흥이라는 설과 두만강 일대라는 설이 있다. 9성 설치 이후 여진족의 침입이 이어지자,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려주었다.

13세기 초,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변하였다. 몽골이 금을 공격하고 북중국을 점령하자, 고려와 몽골의 접촉도 시작되었다. 고려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일삼던 몽골은,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사신이 귀국길에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이로부터 고려는 40년 동안 몽골과 전쟁을 벌였다(1231~1270).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이 기간에 김윤후가 이끈 민병과 승군이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撒禮塔)의 군대를 물리치는 등 일반 민중의 항쟁이 이어졌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까지도 몽골에 대항하여 싸웠다.

고려 조정에서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났다. 몽골은 고려를 완전 정복하겠다는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안겨 준 결과였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몽골과의 전쟁때 처음 충주 부사 우종주가 매양 장부와 문서로 인하여 판관 유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몽골병이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성 지킬 일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의견상 차이가 있어서 우종주는 양반 별초(兩班別抄)를 거느리고, 유홍익은 노군(奴軍)과 잡류 별초(雜類別抄)를 거느리고 서로 시기하였다. 몽골병이 오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 등과 함께 다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오직 노군과 잡류만이 힘을 합하여 쳐서 이를 쫓았다. 〈고려사〉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 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 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러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한 왕의 측근 세력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몰려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하였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신채호의 서경 천도 운동 인식

(고려 인종 13년) …… 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王師 : 왕의 군대)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알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가(郎家)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지배층은 이와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의종 역시 측근 세력을 키우면서 이들에 의존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고, 문신 우대와 무신 차별에 따른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이러한 지배 체제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 무신정변이었다(1170).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려 나갔으며, 저마다 사병을 길러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최충헌은 정권을 잡자,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한편, 농민 항쟁의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회 개혁책은 흐지부지되고, 그는 오히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다.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도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고, 더 나아가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정국이 안정되면서 최우는 문학적인 소양과 함께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을 등용하여 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최씨의 집권으로 무신 정권이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국가 통치 질서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최씨 정권은 권력의 유지와 이를 위한 체제의 정비에 집착했을 뿐, 국가의 발전이나 백성의 안정을 위한 노력에는 소홀하였다.

무신 집권자의 변화는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 순서이다.

중방은 최고위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최고 권력 기구였다.

교정도감은 최씨 정권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치 기구였다.

삼별초는 최우가 집권하면서 설치한 야별초에서 분리된 좌별초, 우별초와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던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말한다.

지방의 행정 조직도 성종 초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을 5도와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 4도호부, 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5도는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하였다. 도에는 주와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북방의 국경 지대에는 동계⋅북계의 양계를 설치하여 병마사를 파견하고,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군사적인 특수 지역이었다.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군⋅현과 진까지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다. 속현과 향⋅부곡⋅소 등 특수 행정 구역은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조세나 공물의 징수와 노역 징발 등 실제적인 행정 사무는 향리가 담당하였다. 향리는 원래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중소 호족 출신이었는데, 집권적 지배 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하여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행정 실무자가 되었다.

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군적에 오르지 못한 일반 농민으로 16세 이상의 장정들은 지방군으로 조직되었다.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에 주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고려의 관리는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과거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으로 나뉜다. 제술업은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고, 명경업은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잡업은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을 시험하여 기술관을 뽑았다.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제술과나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가 응시하였다. 백정 농민은 주로 잡과에 응시하였다.

한편,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 등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는 음서의 혜택을 받아 관료로서의 지위를 세습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적 특성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음서의 범위는 고려 시대에는 공신과 종실의 자손 외에 5품 이상 관료의 아들, 손자, 사위, 동생, 조카 등에게도 음서의 혜택을 주었다.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이었다.

이들 중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부른다. 문벌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또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차지하여 정치 권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거의 독점하였다.

한편, 이들은 비슷한 부류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장악하였다. 특히,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벌 귀족의 성장에 따라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리 중에서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보좌하는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이들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측근 세력은 문벌 귀족을 비판하면서 정계에 진출한 신진 관리 중에서 왕의 측근 세력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예종 때의 한안인이다.

성종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다.

이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성종은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 또,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아울러 과거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였으며, 2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제도 새로 마련하였다.

최승로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로, 유교 사상에 입각한 28조의 개혁안을 성종에게 건의하였는데, 그 중에서 22조가 전해진다.

성종은 지방 제도 정비하였다.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하였으며,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최고 관서로서 중서문하성을 두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삼사는 송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 맡았다.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한편, 재신과 추밀은 6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최고직을 겸하여 중앙의 정치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대간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이나 고위 관리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중서문하성은 재신과 낭사로 구성되었다. 재신은 국가의 정책을 심의하고, 낭사는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중추원은 군사 기밀을 담당하면서 재신과 함께 국정을 총괄하는 추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선으로 구성되었다. 대간의 역할과 기능으로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과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가지고 있었다.

궁예를 몰아 낸 뒤 신하들의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안으로는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고, 밖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하였다. 태조는 궁예와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 냄으로써 신라인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하자,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당시 고려에 온 발해 유민 중에는 관리, 장군, 학자, 승려 등이 상당수 있었는데, 태조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후삼국 통일에 활용하였다. 특히,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우대하여 동족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 태조는 호족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어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태조는 이어 태봉의 관제를 중심으로 신라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 갔다. 또, 지방 호족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심관과 기인 제도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한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자들과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어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고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으며,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가지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정계(政誡)와 계백료서(誡百寮書)는 태조가 임금에 대한 신하들의 도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지은 책으로, 현재 전하지 않는다.

956년(광종 7)에 실시한 노비안검법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기 위한 법이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10세기 초, 중국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흥망하는 가운데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성장하였다. 5대의 혼란을 수습한 송은 중앙 집권적인 황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과거 제도를 강화하여 문반 관료 중심의 문치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송은 국방력의 약화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국가 재정도 궁핍해졌다. 이를 극복하고자 한 왕안석의 변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2세기 초에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쯔 강 이남 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어 강남이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은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이 크게 일어나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아시아의 대부분과 러시아 남부 지역까지 장악하는 세계 제국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동서 문화 교류가 크게 촉진되었다.

일본은 9세기 중엽에 국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이 장원을 소유하고 무사를 고용함으로써 특유의 봉건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인도에서는 굽타 왕조가 무너진 후 정치적 분열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이 침투하였다.

한편, 서양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 서양의 중세 사회는 로마 가톨릭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 그리스 정교 중심의 비잔티움 문화권,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걸친 이슬람 문화권으로 형성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서유럽 세계 형성의 중심이 된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회와 제휴하여 성장하면서 로마 교회를 후원하는 세력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9세기에 분열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유럽 세계에는 고전 문화와 크리스트 교에 게르만적 요소가 결합된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성장하였다.

서유럽에서는 봉건 제도가 성립되어,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분권 체제가 이루어졌다. 봉건 제도의 경제적 단위는 귀족과 기사들이 소유한 장원이었다. 장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대체로 부자유 신분인 농노로서, 이들은 장원의 주인인 영주와 토지에 예속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 교회가 크게 성장하면서 그 주교는 교황이라 불리고, 교단 조직이 형성되었다. 이에, 크리스트 교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이 성립되어 로마 가톨릭이 서유럽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비잔티움 제국은 약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이 강하였으며, 황제 교황주의의 그리스 정교가 발달하였다. 비잔티움 문화는 초기 서유럽 문화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북동부의 슬라브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동유럽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이슬람 제국은 아프리카 북부를 지배한 뒤, 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슬람 문화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북부의 크리스트 교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이슬람 세력은 유럽 지역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8세기 후반 이후,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다. 지방 세력들도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후백제는 차령 산맥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으며, 호족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을 토대로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그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국호를 마진(후에 태봉으로 변경)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경북 문경 가은)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자활하다가 후에 가업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 드디어 후백제 왕이라 스스로 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었다. …… 〈삼국사기〉

○ 궁예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 선종이 왕이라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옛 서울 평양은 오래 되어서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의 통일 전쟁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 고구려의 전쟁이었다.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이듬해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초기에는 이를 방어하였으나, 내분으로 인하여 결국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둘째 단계는, 신라와 당의 전쟁이었다. 일찍이 신라는 당과 군사 동맹을 맺으면서 적어도 평양 이남의 땅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밀약을 맺었으나, 당이 삼국 전체를 수중에 넣으려는 의도를 보이자,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유민을 포섭하여 함께 당의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을 차지하여 불완전하나마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설계두는 신라의 귀족 자손이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술을 마시며 각기 그 뜻을 말할 때, “신라는 사람을 쓰는 데 골품을 따져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뛰어난 재주와 큰 공이 있어도 한도를 넘지 못한다. 나는 멀리 중국에 가서 출중한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 영화를 누리며, 높은 관직에 어울리는 칼을 차고 천자 곁에 출입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621년 몰래 배를 타고 당으로 갔다. 〈삼국사기〉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영주로 이사하였다. …… 대조영은 드디어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 계루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하여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대조영은 용맹하고 병사 다루기를 잘하였으므로,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차 그에게 들어갔다. 〈구당서〉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우리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 말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도 유교 정치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 대학인 국학도 설치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한편,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9주에 1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통일 신라의 통치 체제 변화는 중국식 정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 관부의 장관과 주의 도독, 군대의 장군 등 권력의 핵심은 모두 중앙 진골 귀족이 독점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정치 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에는 15부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주와 현을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 행정 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통일 신라에는 위화부(이부), 조부와 창부(호부), 예부, 병부, 좌⋅우 이방부(형부), 예작부(공부) 등이 있어 중국의 6전 제도와 비슷하게 행정을 분담하였다.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와서 거주하게 하던 것으로, 고려 시대에는 기인 제도로 이어졌다.

통일 이후 신라는 강화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토대로 왕권을 전제화하였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 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다. 중앙 정치 기구와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또,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다.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다. 반면에, 진골 귀족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거나 행정 실무를 맡아 보았다.

이렇게 확립된 전제 왕권은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경덕왕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녹읍이 부활되었고, 사원의 면세전이 늘어나면서 국가 재정도 압박을 받았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자, 중앙의 귀족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사치 생활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은 당의 안동 도호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계속 저항하였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비록 그 영역에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내는 동안 신라는 백제와 대결하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 당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끈 백제의 결사대를 격파한 후에 사비성으로 진출하였고, 당군은 금강 하구로 침입하였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660).

백제 멸망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여 성을 회복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부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갔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고,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동북 아시아의 패권자로 군림하던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668).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받든 검모잠과 고연무 등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과 오골성을 근거지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때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고, 후에는 신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지배하려 하였다. 또, 경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였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 도호부도 요동성으로 밀어 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의 이용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 낸 사실에서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 또, 고구려⋅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가 중앙의 지배 집단이 되었다. 각 부는 중앙 왕실에 예속되었으나, 각 부의 귀족은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여러 귀족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여러 부의 힘을 통합하여 국가의 동원력을 강화하는 일은 각 부의 귀족으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결정하였다.

그 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관등제가 정비되어 각 부의 귀족과 그 아래에 있던 관리들은 왕의 신하가 되었다. 이로써,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이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삼국의 관등제와 관직 체계의 운영은 신분제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다. 신라는 관등제를 골품 제도와 결합하여 운영하였다. 즉, 개인이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골품에 따라 정하고, 일정한 관직을 맡을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신라와 비슷하게 운영하였다.

삼국의 중앙 정치는 고구려의 경우 대대로를 비롯하여 10여 등급의 관리들이 나누어 맡았다. 백제는 왕 밑에 좌평을 비롯한 16등급의 관리가 있어 나랏일을 맡아 보았는데, 그 중에서 상좌평이 최고 책임자였다. 신라는 국가가 발전해 감에 따라 병부와 집사부 등 여러 관서를 차례로 두었다. 또,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은 귀족 회의를 주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였다.

삼국의 중앙 지배층은 정복 지역을 세력의 크기에 따라 성이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원래 성이나 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삼국은 뒤에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 아래의 성이나 군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말단 행정 단위인 촌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 세력을 촌주로 삼았다.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방령은 각각 700~1200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신라의 군주는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정을 거느렸다. 신라에는 정 외에도 서당이라 불리는 군대가 있었다.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가 동북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자, 고구려에는 위기감이 점차 높아졌다. 이에,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남쪽의 백제, 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면서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를 건국한 문제와 뒤를 이은 양제는 거듭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 냈고, 백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온 양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살수 대첩, 612).

수의 뒤를 이은 당도 고구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당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국경의 여러 성이 함락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안시성을 중심으로 민⋅군이 협력하여 마침내 당군을 물리쳤다(645). 이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빈번한 침략을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낸 것은 고구려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반도 침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고구려는 3세기 중반 위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소수림왕 때에는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태학의 설립 등을 통해 지방에 산재한 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한편, 신라는 5세기 초에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5세기 말에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의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그 후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백제는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면서(475)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백제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함과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진흥왕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결국,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562)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철기 문화의 보급과 이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토대로 성장한 여러 소국은 그 중에서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하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 왕은 자기 집단 내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활발하게 정복하여 영역을 확대하였고, 정복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차례로 건국되었다고 하였으나,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은 일찍부터 중국 문화와 접촉한 고구려가 가장 이르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 과정에서 커진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왕권이 안정되어 왕위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었고, 통합된 여러 집단은 5부 체제로 발전하였다.

이후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기원전 18),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 내면서 성장하였다.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되었다(기원전 57).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왕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또,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한편,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그 후로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철기 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점진적인 사회 통합을 거쳐 2세기 이후 여러 정치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세기경에는 이들 사이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걸쳤다.

가야의 소국들은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 등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다. 또, 풍부한 철의 생산과 해상 교통을 이용하여 낙랑과 왜의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이 발달하였다.

4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밀려 전기 가야 연맹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가야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고대 국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왕정 체제였다. 왕의 권력은 점차 강화되어 전제화되었고, 귀족들은 왕과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갔다. 귀족들은 원래 부족 사회의 족장 출신으로서 소수의 혈연적 특권 계층이고 매우 폐쇄적인 신분이었으므로, 지방 세력이나 다른 세력이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조직한 통치 체제도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아직 관직 체제가 완비되지 않았고, 행정 업무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정국의 운영도 합리성이 부족했고, 힘의 논리가 더 작용하였다. 특히, 영토 확장을 위하여 주변 국가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므로 군사력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을 이룬 중국은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는 주나라가 쇠퇴하면서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기를 겪었다. 진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진은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고, 뒤를 이은 한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서역과 교역을 확대하였다. 특히, 한은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하여 유교주의적 중국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3세기 초 후한이 멸망한 뒤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삼국 시대와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로 이어졌다. 이 때, 양쯔강 이남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되었고, 문벌 귀족이 사회의 지배 세력이 되었으며, 불교가 융성하는 등 귀족 문화가 발달하였다.

6세기 말에 수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무리한 고구려 원정 끝에 멸망하고, 7세기에 당이 건국되었다. 당에서 발달한 한자, 유교, 불교, 율령 체제 등은 우리 나라, 일본, 베트남 등에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을 이루었다.

한편, 인도에는 아리아 인이 남하하여 철기 문화를 보급하고, 브라만 교와 카스트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어 브라만 교에 반대하고 평등을 강조한 불교가 성립하였다. 마우리아 왕조 때 정리된 소승 불교는 동남 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쿠샨 왕조 때에 성립한 대승 불교는 간다라 미술과 함께 중국, 우리 나라, 일본으로 전파되어 이들 지역에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굽타 왕조 시대에는 인도의 민족 종교인 힌두 교가 성립되고, 인도의 고전 문화가 완성되어 인도 문화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강력한 전제 국가가 발전하였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번성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대립하였다. 7세기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가 이슬람 교를 창시하여 이슬람 문화권이 형성되어 갔다.

서양에서는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가 발전하여 서양 문화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에서는 시민 중심의 민주 정치가 발전했고, 인간 중심의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4세기 말에 그리스가 몰락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되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발전하였다.

로마는 기원전 3세기 말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이어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로마 공화정은 혼란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1세기 말에 제정이 성립되어 약 200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2세기 말경부터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겪고, 사회⋅경제 기반도 흔들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4세기 말에 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395).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하고(476), 비잔티움 제국은 이후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 등을 종합하여 서양 고대 문화를 완성하였으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특성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법률이 발전하여 로마법이 성립하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 세계 종교로 성장한 크리스트 교는 로마 문화에 계승된 그리스의 인간 중심 사상과 함께 서양 문화의 2대 조류가 되었다.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옥저는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옥저는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고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동예 역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다. 특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하였다. 동예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족외혼(族外婚)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고조선 남쪽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기원전 2세기경에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났다.

마한은 천안⋅익산⋅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여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변한은 김해⋅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4만~5만 호였다. 그 중에서 큰 나라는 4000~5000호, 작은 나라는 600∼700호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의 지배자 중에서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소국의 일반 사람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으며, 초가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또,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다.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이 모여서 날마다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를 지었다. 특히,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철기 시대 후기의 문화 발전은 삼한 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다. 지금의 한강 유역에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다. 또, 낙동강 유역에서는 구야국이, 그 동쪽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중앙 집권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각각 가야 연맹체와 신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부여, 고구려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가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법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조선의 8조의 법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부여의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이것은 수렵 사회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12월에 열렸다. 이 때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부여는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또 이들의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기원전 37).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 대립 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독자적으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잡았다. 이 지역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힘써 일을 하여도 양식이 부족하였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 지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 가의 국내성(집안)으로 옮겨 5부족 연맹을 토대로 발전하였다. 그 후,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의 군현을 공략하여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부전 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을 받았다.

고구려도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렸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또,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국동대혈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중국이 전국 시대 이후로 혼란에 휩싸이면서 유이민이 대거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고조선은 그들을 받아들여 서쪽 지역에 살게 하였다. 그 뒤, 진⋅한 교체기에 또 한 차례의 유이민 집단이 이주해 왔다. 그 중에서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받아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는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갔다. 그 후,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의 사용은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고조선은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발전을 기반으로 고조선은 중국의 한과 대립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한의 무제는 수륙 양면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고조선은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의 내분이 일어나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 주는 것으로 8조의 법이 있었다. 그 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만 전해진다. 이를 통하여 당시 사회에 권력과 경제력의 차이가 생겨나고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면서 형벌과 노비도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는 노동력과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고 보호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한의 군현이 설치된 후 억압과 수탈을 당하던 토착민은 이를 피하여 이주하거나 단결하여 한의 군현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의 군현은 엄한 율령을 시행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법 조항도 60여조로 증가하였고, 풍속도 각박해져 갔다.

고조선의 사회상을 알려 주는 것으로 8조의 법이 있었다. 그 중에서 3개 조목의 내용만 전해진다. 이를 통하여 당시 사회에 권력과 경제력의 차이가 생겨나고 재산의 사유가 이루어지면서 형벌과 노비도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는 노동력과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고 보호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한의 군현이 설치된 후 억압과 수탈을 당하던 토착민은 이를 피하여 이주하거나 단결하여 한의 군현에 대항하였다. 이에 한의 군현은 엄한 율령을 시행하여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법 조항도 60여조로 증가하였고, 풍속도 각박해져 갔다.

사회와 경제의 발달에 따라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 시기의 예술은 종교나 정치적 요구와 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사장이나 족장들이 사용했던 칼, 거울, 방패 등의 청동 제품이나 토제품, 바위그림 등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동으로 만든 도구의 모양이나 장식에는 당시 사람들의 미의식과 생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또,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의식용 도구에는 말이나 호랑이, 사슴, 사람 손 모양 등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거나 기하학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이들은 주술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흙으로 빚은 짐승이나 사람 모양의 토우 역시 장식으로서의 용도 외에도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위 면에 새긴 바위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활기찬 생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울주 반구대의 바위그림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고래, 그물에 걸린 동물, 우리 안의 동물 등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사냥과 고기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것으로 보인다.

고령 양전동 알터의 바위그림에는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 등의 기하학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바위그림 유적은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 농업 사회에서 보이는 태양 숭배와 같이 풍요로운 생산을 비는 제사 터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였다. 이들 중에서 강한 족장은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점차 권력을 강화해 갔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기원전 2333).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의 하나인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이 나오는 지역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단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승되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떤 요소는 후대로 가면서 새로 첨가되기도 하고 때로는 없어지기도 하였다.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때,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이들은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주로 구릉 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하였다. 사유 재산의 성립과 계급의 분화에 따라 지배 계급은 농사와 형벌 등 사회 생활을 주도하였다. 이는 신석기 시대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에 계급의 분화와 함께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질서가 성립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층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통치 이념을 내세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하였다.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해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단군은 제정 일치(祭政一致)의 지배자로, 고조선의 성장과 더불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신석기 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요령(랴오닝), 길림(지린성),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 고인돌도 이 무렵 나타나 한반도의 토착 사회를 이루게 된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 경제가 그전보다 발달하고, 청동기 제작과 관련된 전문 장인이 출현하였으며,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중국의 요령성, 길림성 지방을 포함하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시기의 전형적인 유물로는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등의 석기와 비파형 동검, 거친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 그리고 미송리식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등의 토기가 있다. 이들 유물은 청동기 시대의 집터를 비롯하여 고인돌,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등 당시의 무덤에서 나오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동검인 비파형 동검은 만주로부터 한반도 전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파형 동검의 분포는 미송리식 토기등과 함께 이 지역이 청동기 시대에 같은 문화권에 속하였음을 보여 준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는 지역에 따라 모양이 약간씩 다르다. 밑바닥이 편평한 원통 모양의 화분형과 밑바닥이 좁은 팽이형이 기본적인 모양이며, 빛깔은 적갈색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철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업이 발달하여 경제 기반이 확대되었다. 철제 무기와 철제 연모를 씀에 따라 그때까지 사용해 오던 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 변하였다.

한편, 철기와 함께 출토되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은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보여 준다. 또,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붓은 당시에 이미 한자를 쓰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청동기 문화도 더욱 발달하여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청동기 시대 후반 이후, 비파형 동검은 한국식 동검인 세형 동검으로, 거친무늬 거울은 잔무늬 거울로 그 형태가 변하여 갔다. 그리고 청동 제품을 제작하던 틀인 거푸집도 전국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토기는 민무늬 토기 이외에 입술 단면에 원형, 방형, 삼각형의 덧띠를 붙인 덧띠 토기, 검은 간토기 등도 사용되었다.

청동기⋅철기 시대에는 이전부터 주요한 생산 도구로 사용되던 간석기가 매우 다양해지고 기능도 개선되어 생산 경제도 좀더 발달하였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돌도끼나 홈자귀, 괭이, 그리고 나무로 만든 농기구로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이삭을 잘라 추수하는 등 농경을 더욱 발전시켰다. 농업은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사냥이나 고기잡이도 여전히 하고 있었지만 농경의 발달로 점차 그 비중이 줄어들었고, 돼지, 소, 말 등 가축의 사육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집터 유적은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된다. 대체로 앞쪽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북서풍을 막아 주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는 곳에 우물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취락 여건으로, 오늘날 농촌의 자연 취락과 비슷한 모습이다. 집터의 형태는 대체로 직사각형이며, 움집은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바뀌어 갔다. 움집 중앙에 있던 화덕은 한쪽 벽으로 옮겨지고, 저장 구덩도 따로 설치하거나 한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들었다. 창고와 같은 독립된 저장 시설을 집 밖에 따로 만들기도 하였고, 움집을 세우는 데에 주춧돌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집터는 넓은 지역에 많은 수가 밀집되어 취락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한편, 제주시 삼양동의 경우, 철기 시대 전기의 계급 사회의 발생을 알려 주는 대규모의 집터(마을)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농경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정착 생활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같은 지역의 집터라 하더라도 그 넓이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 작업장, 집회소, 공공 의식 장소 등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사회 조직이 점차 발달하였고 복잡해졌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보통의 집터는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4∼8명 정도의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로, 이는 한 가족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여성은 주로 집 안에서 집안일을 담당하고 남성은 농경, 전쟁과 같은 바깥일에 종사하였다. 한편,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힘이 강한 자가 이것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였다. 생산물의 분배와 사유화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빈부의 격차와 계급의 분화를 촉진하였다. 계급의 분화는 죽은 뒤에까지도 영향을 끼쳐 무덤의 크기와 껴묻거리의 내용에 반영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이 만들어졌고, 철기 시대에는 널무덤과 독무덤 등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 계급 사회의 발생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무덤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의 전형적인 형태는 보통 탁자식에서 볼 수 있듯이, 4개의 판석 형태의 굄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덮개돌을 얹은 것이다.

고인돌은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분포해 있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에 설치하기까지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이 가진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정치 권력이나 경제력에서 우세한 부족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는 선민 사상을 가지고, 주변의 약한 부족을 통합하거나 정복하고 공납을 요구하였다. 청동이나 철로 된 금속제 무기의 사용으로 정복 활동이 활발해졌고, 이를 계기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평등 사회는 계급 사회로 바뀌어 가고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가 나타났는데, 이런 지배자를 족장(군장)이라고 한다. 족장은 청동기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한 북부 지역에서 먼저 등장하였다.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 생활이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에 잡곡류를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쓴 주요 농기구로는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등이 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지는 않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농경은 집 근처의 조그만 텃밭을 이용하거나 강가의 퇴적지를 소규모로 경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냥과 고기잡이가 경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식량을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주로 활이나 창으로 사슴류와 멧돼지 등을 사냥하였고, 여러 가지 크기의 그물과 작살, 돌이나 뼈로 만든 낚시 등으로 고기잡이를 하였다. 또, 굴, 홍합 등 많은 조개류를 먹었는데, 때로는 깊은 곳에 사는 조개류를 잡아서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농경 도구나 토기의 제작 이외에도 원시적인 수공업 생산이 이루어졌다. 가락바퀴나 뼈바늘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옷이나 그물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도구가 발달하고 농경이 시작되자 주거 생활도 개선되어 갔다. 집터는 대개 움집 자리로, 바닥은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다. 움집의 중앙에는 불씨를 보관하거나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위치하였다.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을 만들어 식량이나 도구를 저장하였다. 집터의 규모는 4, 5명 정도의 한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신석기 시대에는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부족은 혈연을 바탕으로 한 씨족을 기본 구성 단위로 하였다. 이들 씨족은 점차 다른 씨족과의 혼인을 통하여 부족을 이루었다. 그러나 부족 사회도 구석기 시대의 무리 사회와 같이 아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지 않았고, 연장자나 경험이 많은 자가 자기 부족을 이끌어 나가는 평등 사회였다.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이나 자연물에도 정령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태양과 물에 대한 숭배가 으뜸이었다.

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고, 영혼이나 하늘을 인간과 연결시켜 주는 존재인 무당과 그 주술을 믿는 샤머니즘도 있었다. 그리고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한 동식물과 연결시켜 그것을 숭배하는 토테미즘도 있었다.

이 시대의 예술품으로는 주로 흙을 빚어 구운 얼굴 모습이나 동물의 모양을 새긴 조각품, 조개 껍데기 가면, 조가비 또는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등이 있었다.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다. 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이 시기에 성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가 고조선이다. 이후,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과 대결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철기가 보급되었고, 그 후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되었다. 이 나라들은 철기를 사용하여 농업을 발전시키고 독특한 사회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일부는 다른 나라에 통합되었고, 일부는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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